여러 자료들, 책이나 블로그 등의 글들을 보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의식 과잉'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횡단보도 건널 때마다 양옆에 신호 대기 중인 차들이 나를 보고 있는 것 같고, 회사에 출근해서 직원들에게 인사했는데 그날따라 맞받아치는 인사가 시원찮으면 시무룩해지는 것 등등.
근데 이것도 어느 정도 신체적, 정신적인 에너지가 있어야 가능한 게 진짜 힘들 때는 누가 보든 말든 엄청 기운 없이 터벅터벅 걷고 누가 옆에 있는지 자각조차 못 하게 된다.
나는 꽤나 어릴 때부터 자의식 과잉이 심했던 사람이었기에 항상 남을 의식하고는 했었는데, 예전에 엄청 힘든 일이 있어서 지하철에서 남이 보든 말든 울었던 때를 생각하면 자의식 과잉도 아예 치료 불가능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기분과 상황에 따라 선택 가능하기도 하고.
사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면 자의식이고 뭐고 과하지 않게 됐을 텐데 그것을 인정하는 게 무의식적으로라도 참 어려운 것 같다. 내가 그보다 괜찮은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그걸 인정하는 순간 내 자신이 초라한 존재라는 사실을 마주하는 게 두려워서일 것이다.
예전에 일하던 회사에서 나보다 자의식 과잉이 훨씬 심한 직원을 본 적이 있다. 나중에 자존감 얘기하면서도 나올 것 같아서 R이라고 특정하겠다. R은 약간의 나르시시즘도 있었고 아무튼 자의식 과잉이 굉장했다. 남들이 R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옷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자기 옷 얘기하는 줄 알고 느닷없이 그 옷 정보를 말해준다든가. 차라리 이건 나름 귀여운(?) 일화이기라도 하지 R이 정서적으로 불안정할 때는 같이 일하는 사람으로서 굉장히 불편했다. 정말 굉장히.
자의식 과잉이 빚어낸 나르시시즘과 수동공격, 낮은 자존감 등이 그 불편함의 원인들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남들 눈에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 다른 사람에게 잘해 주고 다정하게 대하지만(=자의식 과잉) 자기가 잘해 준 만큼 돌아오지 않으면 수동공격을 해버리고 자신에 대한 얘기가 아님에도 혼자 트리거가 눌리던(낮은 자존감) 사람이었음.
특히 R에게 어떤 힘든 사건이 일어났었는데 그 이후에 그러한 증상(?)들이 더 심해졌기에 처음에는 그 사건 때문에 정신적으로 힘들어서 저러나 보다 이해해 보려 했는데 나중에 보니 그게 아니었다. 그냥 원래 그런 사람이었는데 그 사건 이후에는 자신의 본성을 숨길 에너지가 없어진 것뿐이었다. 진짜 그 회사 다니면서 R이랑 대놓고 한바탕 싸우고 싶었던 적이 많았는데 나보다 나이도 많고 직급도 높았기 때문에, 그리고 나는 신입이었기에 R의 편이랄까 인맥이 훨씬 많았기 때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던 게 지금도 한으로 남는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 R은 다른 부서로 가게 되었고 나도 현재는 다른 곳에 근무하고 있어 그녀와의 인연은 끝이 났지만 꽤 오랜 시간이 흘러도 간혹 그녀가 생각나서 괴롭다. 회사 다니는 동안에는 진짜 정신이 불안정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R의 마음 속에도 그녀 나름의 지옥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약간 동정심도 들고 불쌍하게 느껴졌다. 남이 보기에도 마음에 지옥이 있는 게 보일 정도면 그 지옥을 안고 사는 R의 정신은 온전할까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