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놈의 트리거
'피해의식'은 이것을 글로 적는 것조차 나에게 불편한 단어이다. 예전부터 스스로 피해의식이 있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것을 고치려고 무한정 노력하며 살고 있기 때문에. 누군가(J라고 하겠음) 지나가는 말로 나에게 "피해의식 있어?"라는 말을 했었는데 정말로 지나가는 말로 한 상황이었음에도 트리거가 눌려서 몇년이 지났는데도 가끔씩 생각난다. 사실 지금까지 생각이 나는 결정적인 이유는 그 말을 내뱉은 J가 그야말로 피해의식이 상당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걔한테 그 말을 들은 게 억울해서다. 그 당시에 너무 지나가는 말로 그렇게 내뱉고 지나가서 너무 벙쪘고 제대로 대응을 못 했거든.
물론 내가 피해의식이 없다는 건 아닌데, 그 얘기를 피해의식으로 똘똘 뭉친 사람한테 들었다는 게 억울했다. 온몸에 오물을 묻힌 사람이 내 바지에 살짝 묻은 오물을 보고 '똥 묻었네? 더러워'라고 했을 때의 억울함 같은? 그래. 내 바지에 똥이 묻은 건 맞는데 내가 닦아야 하는 것도 맞는데 너는 온몸에 똥칠을 했다니까?
보통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부족한 부분이나 트리거가 눌리는 부분을 욕으로 쓰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예컨대 외모에 강박이 심한 사람은 누군가한테 욕할 때 '얼굴도 못생긴 게! 뚱뚱한 게!' 이런 식으로 욕하게 되고, 부모님과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은 '가정교육 안 받았냐? 느그 부모 뭐하는데?' 이렇게 욕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위에 피해의식 운운한 그 사람한테서 저 말을 들었을 때 처음에는 '어라?' 하면서 스스로 수치심을 느꼈었지만 점차 J의 행동을 분석(?)해 가면서 느낀 건 오히려 본인이 피해의식이 강하기 때문에 그걸 욕으로 썼지 않나 싶은 거다.
J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선택한 상황, 요즘 말로 '누칼협'인 상황에서 자신이 그렇게 선택했기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은 자각하지 못하고 사람들이 자신을 악한 상황으로 몰아갔다고 여기거나 그 옆의 사람과 비교하면서 스스로 자기방어가 심해지던 사람이었다. 자신에 대한 하소연을 하면서도 누군가 불쌍하게 여기면 갑자기 뭔가의 버튼이 눌리며 자기방어를 했었기에 그녀와 대화하다가 어리둥절했던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러면서도 자존심은 너무 강해서 그냥 웃고 넘어갈 수 있는 상황에서도 갑자기 허세를 부리고 자기방어를 하면서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려고 들었다. 그게 더 없어 보이는지도 모르고.
근데 정말 신기한 게 전에 말했던 자의식 과잉 그녀 R도 J를 싫어했다는 것이다. 타인이 보기에는 그냥 똥과 설사의 대결 느낌이었는데(물론 나도 누군가한테는 똥 혹은 설사일 것임) 뭔가 이 사람의 피해의식으로 인한 자존심 지키기, 허세, 자기방어 등이 R의 자의식 과잉에 불편함을 끼쳤던 것 같다. R은 남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연극성 다정함과 약간의 수동공격으로 점철된 사람이었기에 타인을 통제하고 싶어하는 욕구가 강했는데 그와 반대로 J는 누군가한테 통제받는 느낌 자체가 자신이 지는 거라고 생각했고 자존심을 갉아먹는 일이었기에 둘이 상충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상대방의 트리거를 누르지 않기 위해 서로 조심하는 게 보여서 뭔가 웃겼다. R는 J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도 좀 만만한 사람들한테는 자신의 본성을 잘 드러냈고, J는 R의 트리거를 누르지 않으려고 근근히 눈치를 보면서 행동했음. 그러면서도 좀 순한 사람들 앞에서는 허세부리며 자존심을 지켰던 것은 덤. 뭔가 장난이었든 오해였든 자신의 약점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면 R과 J 둘 다 트리거가 눌리면서 왈왈대던 것이 둘의 공통점이었던 것 같다. 심리 분석하는 걸 좋아하던 나에게는 '왜 저래?' 싶으면서도 보는 재미가 있었음.
좀 신기했던 건 이런 것들을 나만 진지하게 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 웬만한 사회생활 해본 사람들은 이미 다 보고 있었던 거라서..나 자신을 속일 수는 있어도 남을 속일 수는 없구나 싶었다. 그리고 누군가도 나의 심연을 들여다 보고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