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병과 외로움과 육아

연휴의 결말

by 한박사

어느 날엔가 조그만 3단 서랍장 가운데 칸 앞판이 떨어졌다. 내 양말이 있는 칸이었고, 양말을 꺼내려던 차에 어이없게 떨어져 버린 것이다. ‘왜 하필 내 양말 칸에? 재수가 없으려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내게 닥친 사건의 어떤 전조였다. 얼마 안 있어 크게 앓아누웠기 때문이다. 5-6월에 걸친 여러 날의 연휴가 끝나가던 주말이었다. 저녁을 먹고 샤워를 마쳤는데, 살짝 몸살감이 왔다. 그리고 그 다음날은 본격적으로 아프기 시작했다.


오뉴월에 오한을 겪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겪어보고서야 알았지만, 흔히 고열에 동반되는 증상인 것 같았다. 나는 긴팔에 긴바지를 입고 침대에 누워 이불을 꽁꽁 싸매야 했다. 그러다 해열제를 먹고 약발이 들어갈 무렵이면 나른해지면서 온몸에 땀이 흠뻑 젖으면서 기운이 소모되는 과정을 몇 번을 반복했다.


사람은 근래의 고통을 더 과장하는 오류를 범하곤 하는 것일까. 주관적으로는 출산 때보다도 아팠던 것 같다. (자연분만에 무통주사를 맞긴 했지만) 그도 그럴 것이 내 인생에 체온기가 41.6도를 찍는 것도 처음 봤으니까. 이번 일로 인해 사람의 체온이 42도가 넘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행히 평소 진통제를 거의 복용하지 않는 편이라 약발이 잘 받는 편이고, 적절한 이성적 판단을 발휘해 위기의 고비고비를 잘 넘겼다.


너무 아프니까 정말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내가 만약 입원하면? 수술이라도 해야 하면? 혹은 죽으면? 그러다 또 비이성적인 기복신앙에 빠져, 자시기도가 효험이 좋다는데 한 번 해봐야지 하다가.(실제로 막 열이 나기 시작한 자정에 한 시간 정도 했다. 근데 나의 경우엔 꽤 잘 들었다.) 도대체 내가 왜 이렇게 된 거지? 아니, 왜 “또” 이렇데 된 거지? 자문해 보았다.


그러니까 나는 작년 여름에 갑자기 크게 아팠다. 그때는 좀 더 오래 앓았고, ‘자율신경 실조증’ 비슷한 후유증도 얻었다. 좀 회복한 이후 나는 작년 하반기 등산을 자주 했다. 솔직히 아프기 전에 나는 운동을 거의 하지 않았던 상태이긴 했다.


그런데 올해는 운동도 매일은 아니더라도 꾸준히 하고(등산, 필라테스) 있었는데? 나름 잠도 잘 자고. 그런데 변수가 하나 있었다. 바로 둘째 육아의 레벨 업. 이 녀석이 더 커지고, 머리도 커지면서 작년보다 훨씬 사고를 치기 시작한 것이다. 스스로 할 줄 아는 게 많아지니 거의 시한폭탄 격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남편에게 요즘 둘째가 너무 힘들다는 얘기를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는 바로 나의 고질병인, 잘 안 먹고 지나치게 독서하는, 어떤 “악습” 때문이다. 타고나기를 신체가 튼튼한 사람이 아니라면, 거기다 아직은 미취학 아동을 육아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계속 이렇게 살다가는 병을 얻는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야말로 이 습관들을 조금씩 개선해 보려고 마음먹었다.


아프면서 가장 많이 드는 생각이 ‘외로움’이었다. 엄청 아프면서도, 만약 지금 응급실에 가면 아이들은 어떻게 하고 남편 다음날 출근은 어떻게 할지를 먼저 계산해 보게 된다. 그럼 나 혼자라도 가야 하나? 고열에 시달리는 한밤중 그런 답이 안 나오는 고민을 하는 와중에 그런 외로움이 더욱더 크게 느껴졌다. 그리고 혹시 입원이라도 하게 되면 우리 아이들은? 모든 퍼스트가 내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고민들을 나 혼자만 해내야 한다는 현실이 조금 서글펐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조금이라도 부담을 지우는 게 쉽지 않은 법이구나!’


무튼 나는 다행히 한 사흘 간의 병마 끝에 회복의 단계에 접어들게 되었고(정말 그 자시기도 덕분이었나?), 조금 유치지만, 하루에 한 번은 꼭 내가 먹고 싶은 것을 정말 맛있게 먹어 보는 호사를 누려 보기로 했다. 입맛이 없더라도, 계속 생각해 내서 어느 한 가지 메뉴는 꼭 먹는 하루를 보낼 생각이다. 사실 ‘오늘 뭐 먹을까?’라는 생각에 하루가 설레는 사람들도 꽤 많을 텐데…


아이들이 없는 점심시간에 혼자서라도 맛집에 가든지, 아니면 열심히 연구해서 정성스레 만들어 먹든지, 먹는 것에 관심을 좀 가져볼 것이다. 신기하게 이렇게 마음을 먹으니 먹고 싶은 음식들이 하나 둘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동안 정말 너무 잘 안 먹고 살았구나…!)


병든 딸이 걱정되는 친정엄마는 왜 이렇게 뭘 잘 안 해 먹냐고, 엄마는 집에서 해 먹는 게 너무 맛있는데 그러냐고. 엄마는 아직도 딸에 대해 모르는 게 하나 있었다. 나는 원래 그렇게 먹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자기가 먹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도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게, 식욕만은 나의 부모님을 닮진 않은 것 같긴 하다. 하긴 따져 보면 닮지 않은 부분은 훨씬 많지만…


아무튼 외롭더라도 혼자 잘 먹어 보자. 내 몸에 피가 되고 살이 되어 내 건강에 도움을 주는 것들이라 생각하고서. 영혼도 육체가 있어야 그 진가를 드러내는 법이니까. 그동안 너무 머리만 쓰고 살아온 것 같아 반성한다. 이제 좀 섭식도 신경 쓰고, 감각적으로도 즐기며 살아야겠다. 그런데 너네(남편, 두 아들)도 허구헌 날 나에게 이거 저거 요구만 하지 말고, 나 좀 먹여주면 안 되니??






keyword
작가의 이전글쉽지 않은 둘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