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고행 행위
오래간 만에 논문을 읽고 쓰면서 그전에는 깨닫지 못했던 나의 괴벽을 발견했다.
굳이 쉬운 길을 놔두고, 어려운 길로 빠지고 마는 것.
일단 내가 어떠한 사안을 두고 있는데, 그 해결 방법이 쉽고 단순한 길이 있고 조금 더 복잡하고 조금 더 깊게 생각해야 하는 길이 있으면 후자에 끌린다는 것이다. 고생은 훨씬 많이 하지만 이상하게 그 길을 택하게 된다. 이런 것이 지적 호기심인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이 성향이 바로 내가 박사를 하게 된 이유구나 싶다. 오늘에서야 제대로 깨달았다. 왜 “복세편살’을 못할꼬.
첫째 아이가 나의 이런 성향을 닮아서 무얼 하나 해도 그렇게 집요한 건지 모르겠다. 뱃속 둘째도 엄마가 이러고 있으니 오타쿠적인 사람이 될까.
이런 거 한다고 뭐가 나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즐거움이 있는 것 같다. 힘들고 쥐어 짜야 하는데 이상하게 재밌어.
사실 태교 삼아 보석 십자수를 좀 했었더랬다. 몇 시간을 앉아서 하는데 여기저기 좀이 쑤셔도 재미를 느꼈다. 그러다 이렇게 오래 앉아 있을 수 있는데 책을 보면 어떨까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연이어 공부까지 하게 된 것이다. 임신 중엔, 더군다나 첫째까지 보면서 논문은 절대 못 쓴다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가끔 배도 당기고 엉덩이도 배기도 하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많을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놀랍다. (이 시간에도 자지 않고서!) 이게 남이 시킨 거라, 혹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하는 거였으면 신세한탄, 스트레스 호소가 장난 아니었을 것 같다. 근데 어디까지나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라서 그런지 피곤하고 힘들긴 하지만 억울하거나 서럽거나 하는 건 없다.
아, 내가 이래서 박사를 한 거구나.
어쩔 수 없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