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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박사 Jul 20. 2023

육아가 개이득이기도 한 이유

그리고 자아실현에 대해서

나의 건강을 어느 정도 되찾고 나니,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점점 유쾌해지고 있다. 원래 육아와 크게

관계되지 않는 집안일은 좀 미루자는 경향이 강해 생각보다 집안일에 대한 스트레스는 없다. 몸과 마음이 편해져서 그런지, 요즘은 아이들의 예쁜 모습들이 시시 때때로 보인다. 시쳇말로 자식들은 이때 부모에게 효도를 다 한다고 하는데, 그만큼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예쁘기 때문이다.


어눌한 말 한마디, 잠깐의 눈웃음, 자기 뜻대로 안 됐을 때의 솔직한 절망감, 모두가 그들의 통통한 젖살과 함께 어우러져 지극한 귀여움으로 귀결된다. 아가들이 왜 이렇게 이쁠까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불완전하면서 때 묻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계산이라든지 고민이 없고, 자신의 욕구에만 충실한 아가들이 참 얄미우면서도 사랑스럽다. 나는 아가들을 보면서 꼭 인간이 대단히 똑똑하고 완벽하다고 해서 사랑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외려 조금은 무력하고 어리석은 점이 보호본능을 자극하고 대가 없이 애정을 주게 되는 측면들이 많다.


어제는 첫째가 좀 잘못을 해서 두 손가락으로 볼을 살짝 꼬집어 주었다. 그랬더니 그 부분을 자기 손으로 가리키며 “싫어요.” 하는데, 그 모습이 너무 어여쁘고 사랑스러워 나도 모르게 웃게 됐다. 육아를 하다 보면 그렇게 의도치 않게 훈육의 진지함이 깨지는 경우가 종종 있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의외로 육아의 참맛이 생겨나게 된다. 어이없지만 나도 어쩔 수 없이 풀어지게 되는 아이들의 의도 없는 애교.


이러한 모습들이 쌓이고 쌓여 엄마의 마음속 어딘가에 어떤 자식들의 이미지 저장소가 생겨나고, 그것이 오랜 기간의 육아 및 양육을 견뎌내게 하는 어떤 에너지 공급망을 하게 되는 것 같다. ‘그래, 그때 너무 귀여워서 눈웃음 한 방에 모든 노여움이 사르르 녹아내렸지. ’ 이러면서 말이다. 그래서 확실히 영유아기의 아이들은 효자임이 틀림없다.


진심인지는 모르겠지만 남편 왈 주말에 아무리 아이들 육아에 시달려도 월요일 출근이 기다려지는 건 아니라고 한다. (혹시 이 사람도 육아의 개이득을 조금 아는 것인가? 나만 아는 줄 알았는데…) 아이들의 진상짓에 두 손 두 발 다 들어도 그들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가장 많이 볼 수도 있는 때가 주말이기에 그런 것 같다. 예컨대 아이가 처음으로 ‘엄마(혹은 아빠)‘를 말했을 때, 첫걸음마를 떼었던 장면, 이런 것들은 아빠들은 많이 놓친다. 물론 사진이나 동영상으로도 이런 모습들을 볼 수도 있지만 직접 보고 경험한 그 순간의 찐감동을 그대로 느끼기는 힘들 것이다. 반면 나는 독박육아를 하는 대신 이런 순간들을 직접 보고 내 마음속에 저장할 수 있다.


가끔은 그저 아이가 앉아서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과자를 먹고 있는 순간이 참 어여쁘단 생각을 하면서 이후에도 두고두고 그 장면들을 떠올리는 경우가 있다. 다소 무더운 오후 어느 날 집 근처 공원에 우리 가족 모두 피크닉을 갔던 어느 날 있었던 일이다. 그때의 모든 순간들, 온도나 습도, 늦은 오후 시간대 특유의 햇살이라던지 아늑함들이 아이의 과자 먹는 모습들과 함께 마음속 어딘가에 깊이 각인된 것 같다. 그때 삶에 아무 고민 없는 아이의 흡족스러운 만족감을 느꼈다랄까. 앞으로도 우리 아이들이 이따금씩 그런 순간들을 느끼면서 살아갔으면 좋겠다.


육아라는 것은 처음으로 내가 아닌 다른 존재에게 더 많은 에너지를 쏟고, 다른 존재의 건강과 행복을 더 염원하게 되는, 인생의 아이러니한 단계인 것 같다. 우리나라도 점차 살 만해지고,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고등교육을 받고, 개인의 자아실현을 독려받으면서 살아온 세대에게는 이 모순적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사실 힘들다. 육아는 자아실현이라기보다는 자아해체(내지 망각?)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이를 보고 “애기는 너무 이쁜데, 내가 없어져. ”라고 하더라. 나 역시 그전의 “나”적인 부분이 많이 사라지거나 옅어졌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 자아실현을 강조했던 그 철학이 반드시 100% 진리는 아니라고. 사람이 다른 무엇보다 자아실현만을 중시하게 되면 결국 끊임없이 남(대부분 직장)을 위해 노동을 하면서, 죽을 때까지 나는 내 일에 최선을 다했다 생각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자아실현’은 노동하는 일꾼들이 필요한 산업시대와 돈이 중시되는 자본주의 사회가 맞물려 다소 왜곡적으로 해석된 개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금전적 대가가 없는 육아나 살림을 우리는 자아실현이라 하지 않는 것인지도.)


나 역시 자본주의 사회의 이념을 생각하면 육아를 하는 나 자신이 좀 허탈하긴 하다. 그렇지만 이런 경험은 돈으로 살 수도 없고, 돈을 초월하는 삶의 경지인 것 같다. 가끔은 내가 이걸 하기 위해 결국 그렇게 열심히 살아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니까 인간이라는 것의 본질에 좀 더 가까워진달까. 돈이 인간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커리어가 ‘나‘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육아를 통해 ‘나’에서 더 확장한 행복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는 것. 그래서 육아는 내게 개이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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