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할머니는 쑥고개 할머니라고 불렸다.
쑥고개 할머니는 늘 말씀이 많았다.
한시도 쉬지 않고 기도하거나 찬송가를 부르거나 어디서 파는 약이 몸에 좋다더라 아니면 큰집 어머니와 사촌 누이 얘기만 했다.
어릴 적 종종 쑥고개 할머니가 우리 집에 다니러 오면 정님 씨의 얼굴은 어두워졌고,
할머니와 함께 자야 했던 어린 나는 그 많은 말씀을 피할 길 없이 들어야만 했다.
아직도 기억나는 이야기.
막냇동생이 태어났을 때 나는 여섯 살이었다.
쑥고개 할머니가 며느리 수발 든다고 오셨다.
어찌나 할머니가 딸만 둘이라고 아들 못 놓는다고 뭐라 하셨던지,
어린아이지만 들은 건 있어가지고
동생 태어나고 얼마 안 된 어느 날, 나는 동네 아줌마들 모인 데서 큰소리로 외쳤다.
우리 엄마 아들 났어요. 고*에요, 고*!
아줌마들이 깔깔깔 웃었고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끄러움을 느꼈다.
자라면서 종종 그 때의 부끄러움을 되새기곤 했다.
쑥고개 할머니 영향이었다.
할머니는 늘 찬송가와 성경 책을 지니고 다니셨다.
혼자 계실 때도 찬송가를 부르거나 기도를 드리곤 했는데
밥 먹을 때도 아들 낳게 해 달라고, 아버지 건강하게 해달라고 오랫동안 기도했다.
나의 엄마 정님 씨는 지금도 가끔,
"네 할머니가 나더러 너 만나고 네 아버지가 병들었다고 뭐라 했어.
교회 나가서 기도 열심히 드리라고.
큰 고모도 같이 그랬어.
건강하던 사람이 나 만나서 결혼한 뒤부터 앓고 있다고.
그게 왜 나 때문이야.
형제들이랑 하던 사업 망하고 혼자 뒷감당하느라 오갈데도 없이 술만 마시고 다니니까 병이 들었지."
하며 울분을 토하곤 한다.
그러면 나도 쑥고개 할머니 흉을 봤다.
"엄마, 옛날에 할머니 오시면 맨날 큰엄마랑 사촌 은영이 얘기만 하셨어.
어렸을 때 우리 집에 오면 한 달 내내 같이 살면서 어쩜 맨날 큰 엄마 이쁘고 은영이 이쁘다는 얘기만 하시는지.
그때도 큰 엄마랑 싸워서 우리 집에 오신 거잖아.
근데도 맨날 큰엄마 이쁘고 살림 잘하고, 은영이 예쁘고 공부 잘한다. 그 말만 했어.
우리 집에 와서 나랑 맨날 자는데 나 예쁘다는 소리는 한 번도 안 하셨어.
어렸을 때인데도 그게 참 이상하다 생각했거든.
할머니는 우리 집에 와서 왜 맨날 큰엄마 이쁘고 은영이 예쁘다는 얘기만 해?
엄마, 나는 그래서 할머니가 예쁘다는 큰엄마도, 은영이도 별로 안 좋아했어. "
오래 전 돌아가신 쑥고개 할머니는 귀가 꽤나 간지러울 거다.
단아한 쪽 머리와 은비녀, 흰 삼베 한복을 입은 쑥고개 할머니는 천수를 누리다 가셨으니
그토록 염원하던 하느님 품에서 천국에 사실 지도 모르겠다.
우리 모녀에게는 이런저런 좋지 않은 추억만 남기고 가셨지만 말이다.
그런데 요즘 내 얼굴에서 종종 쑥고개 할머니의 얼굴이 보여 소스라치게 놀라곤 한다.
유전자의 힘이 참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