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님 씨 된장은 이제 그만

by 농땡선녀


지난주 김장을 해왔다.

작년 김장김치에 지난달에 받아온 김치까지 있어 새 김치 넣을 여유 공간이 부족했다.

크지 않은 김치냉장고에 자리 잡은 친정 엄마표 고추장과 된장을 내지 않고서는 도저히 자리가 나지 않았다.

결국 장을 꺼내고 시댁 표 김장김치를 가득 넣었다.


문제는 결국 된장이다.

김치통 하나 가득한 된장은 도저히 우리 집 냉장고에 다 들어가지 못해 친구와 나눴다.

그러고도 남은 된장은 작은 김치통 세 개에 나눠 도로 냉장고에 넣었다.

정님 씨 된장은 결국 우리 집에서도 천덕꾸러기가 되나 싶었다.


작년 이맘때 나의 엄마 정님 씨는 메주콩 이야기로 나를 꼬셨다.

메주를 쒀야 하는데 근처 가게나 재래시장은 좋은 콩도 아닌 걸 비싸게 판다는 거였다.

나는 기꺼이 평소 이용하던 네** 농산물 카페에서 강원도 농민이 직접 생산해 파는 메주콩을 찾아 주문했다.

며칠 후 도착한 메주콩은 다행히 정님 씨 마음에 쏙 들었다.

당장 씻어 불리고 푹 삶아 으깨 메주를 만들기 시작하더니 며칠 후 네모난 메주가 식탁 밑에 자리 잡았다.

거기가 냉장고 옆이라 따뜻해서 메주 띄우기 좋다나.


식탁 밑에서 꾸덕꾸덕 말린 메주는 특유의 구수한 향을 내뿜기 시작했고

할머니 집에 동거 중인 손녀는 질색하며 싫어했다.

"엄마, 할머니 집에서 맨날 구린 냄새가 나."

이 주일가량 지난 후 메주는 햇빛과 통풍이 잘 되는 앞 베란다로 자리를 옮겼다.

겨우내 베란다에서 숙성되는 메주 향기는 베란다 바람을 타고 집 안팎을 드나들었고

손녀는 집에 들어올 때마다 코를 움켜쥐며 질색팔색 했다.


그렇게 구박받으며 띄운 메주로 정님 씨는 된장과 고추장을 담갔다.

그리고 그 된장 고추장은 거의 전부 내게 돌아왔다.

"아니, 이게 웬 횡재야!"

평소 된장 고추장을 사 먹던 내겐 신나는 일이었는데,

올해부터는 메주를 쑤지 않겠다고 정님 씨가 선언했다.



지난해 찹쌀로 만든 고추장은 맵지도 않고 달기만 해서 동생한테 퇴짜 맞았고,

간장 띄우지 않고 순수 메주와 소금으로만 만든 된장은 황금빛 누런색이 짜지 않아 좋았는데,

어느 날 손녀가 사 온 시중 된장 맛에 그만 정님 씨가 반해버린 것이다.

평소 정님 씨는 진한 육수를 내 팽이버섯과 풋고추를 넣은 된장찌개를 끓여 먹었다.

거의 매일 된장찌개를 즐겼는데 손녀 덕분에 신세대 된장찌개의 맛을 알아버린 것이다.

이후로 '*담"이라는 맛된장에 빠진 정님 씨는 맛없는 본인 된장은 전부 내게 떠넘기고 사다 먹는 편리함을 추구했다.

그러다 급기야 올해부턴 메주도 된장도 고추장도 다 안 만들겠다 선언한 것이다.



그리하여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정님 씨표 된장이 일 년 가까이 우리 집 김치냉장고에 들어있었다.

그리고 이번엔 김장철 천덕꾸러기가 되어 냉장고 한켠으로 옮겨졌다.

사실 된장을 별로 먹지 않는 내가 정님 씨 된장을 다 차지하게 된 것도 아이러니하지만,

지금껏 고추장 된장을 사 먹던 터에 엄마표 된장을 준다 하니 냉큼 받아온 내 욕심도 있다.

어쩌면 냄새난다고 질색하는 손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일 년 동안 10분의 1도 못 먹은 된장을 끼고 앉은 나는 먹지도 않으면서 엄마표 된장이 떨어질까 벌써부터 아쉽다.

된장 없다 하면 정님 씨는 그러겠지.


"얘, 슈퍼 가서 *담 사다 먹어.

그거 크게 한 숟가락 넣어 풀면 훨씬 더 맛있어."


그래. 팔심 넘은 노인한테 메주 띄우는 일, 된장 고추장 쑤는 일 이제는 힘겹잖아.

된장이며 고추장도 사다 드시는 게 맛도 품도 덜 들고 편할 거다.

작년부터 김장도 안 하는 정님 씨는 올해도 우리 집 시댁 김치 한 통을 가져오라 하신다.

편하게 살기로 작정한 것 같다. ㅎㅎ





keyword
작가의 이전글키 작은 딸이 부끄러운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