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주, 이까짓 거, 이야기꽃, 2019.
몇 가지의 생필품을 사러 집을 나선 지 10분도 채 되지 않아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남의 아파트 입구에 서서 잠시 비를 피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10분, 목적지까지도 10분 정도 남은 상황이었다. 돌아가도 반, 돌아가지 않아도 딱 절반의 거리가 남은 시점, 나는 어디로 갈지 선택해야 했다.
왠지 집으로 가는 건 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는 사이 빗방울은 점점 굵어졌다. 저마다의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는 행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살짝 눈이 마주치기를 기대하기도 하였다. 그들이 내 눈빛을 읽고 말이라도 건네주면 어떨까 이런 상상을 하면서 말이다. 아니다, 내가 먼저 말을 걸어보는 거다.
"실례지만 어디까지 가세요? 저 앞 상가까지만 저 우산 좀 씌워주시면 안 돼요?"
대사는 이미 준비되었다. 그러나 행인이 몇 명이나 지나가도 나는 입을 떼지 못했다. 비는 솨아아아 소리를 내며 참 시원하게도 내렸다. 타인의 호의를 기다리는 내가 우스웠다. 도움을 청하는 말도 못 꺼내면서 누가 먼저 짠하고 우산을 씌워줄 상상을 했으니 말이다. 사실 5분 남짓 서있으면서,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면 이 이름 모를 아파트에 용건이 있어 서있는 사람처럼 태연한 척하기까지 했다.
나는 종종 비 예보가 있어도 당장 비가 안 오면 늘 우산을 안 가지고 다녔다. 도시에는 건물 하나 건너 편의점이 있었고 그곳에서 우산은 상시 판매 중이었다. 게다가 대체적으로 갑작스러운 소나기는 늘 나를 피해 간 것 같다는 무한 긍정이, 이런 날 이런 일을 제대로 만들었다.
친구들과 어디 당일치기 여행이라도 갈 때 보면, 보부상처럼 짐을 잔뜩 챙겨 다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제 몸 하나만 '덜렁' 챙겨 나오는 사람도 있다. 굳이 분류하자면 나는 전자에 속하는데 이상하게도 '우산'을 챙기는 일에는 다소 무심한 편이었다.
솔직히 말해 나는,
사실 비를 맞아보고 싶었던 거다.
열 살쯤이었을 것이다.
피아노 학원을 마치고 건물 1층에 내려왔는데 오늘 같은 장대비가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심지어 간간이 천둥까지 쳐댔다. 엄마가 와줄 줄 알았는데, 어쩐 일인지 엄마는 오지 않았다. 피아노 학원으로 다시 올라가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달라 하거나 선생님의 우산을 빌릴 생각은 하지 못했다. 피아노 선생님은 너무나 무서웠고 나는 그 무서운 학원을 하루하루 억지로 다니고 있던 중이었다. 호랑이 굴에서 갓 탈출했는데 다시 올라갔다가 비가 그칠 때까지 학원에서 기다리라고 하면 큰일이었다.
그래서 뛰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금세 내 머리카락과 얼굴을 적셨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우산이 없는데 제가 뭘 어쩌겠어요, 이런 당당한 맘이 샘솟았다. 골목 맞은편에서 오던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쳤는데 아주머니는 나를 보며 활짝 웃으셨다. 나는 더 신나게 뛰었다.
그러다가 천둥이 우르릉 쾅쾅 치면, 어디서 주워들은 상식으로 골목의 양끝에 자리한 전봇대와 나무로부터 최대한 멀어지려 노력했다. 그러니까, 골목을 지그재그로 뛰어다닌 것이다.
우르릉 쾅쾅
"꺄아아아."
오른쪽 전봇대를 피해 왼편으로 뛰었다가, 왼쪽의 플라타너스가 내 몸에 가까운 것 같으면 다시 오른쪽으로 몸을 틀었다. 까만 아스팔트 위, 회색 전봇대, 큰 플라타너스, 골목 양쪽에 간간이 세워져 있던 다양한 승용차들, 저 멀리 보이는 상가 건물들, 양옆으로 펼쳐진 작은 골목들, 그런 풍경들이 내 마음에 새겨져 있다.
비를 흠뻑 맞고 들어갔을 때 현관에서 엄마는 나를 보고 소리쳤다. “거기서 옷 벗고 들어와!"
젖은 옷은 피부에 척 달라붙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무섭고 축축하고 거추장스러웠다. 그 옷을 한 올 한 올 벗고 화장실에 들어가 따뜻한 물로 목욕을 했다. 해방감이 내 몸무게를 반의 반으로 줄이고 있었다. 이러다 정말 날 것만 같아 콧노래라도 불러야 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날기를 꿈꿨다. 이상의 <날개>라든지 언타이틀의 <날개>를 처음 읽었을 때, 천계영의 <언플러그드 보이>에서 남자주인공이 자기 등에 날개가 있다는 소리를 해댈 때, 나는 묘한 동질감을 느꼈었다.
우산 없이 비를 맞으며
골목을 좌우로 뛰어다녔을 때
어쩌면 나는 진짜 잠시 날았는지도 모른다.
우산 없이 비 맞고 다니는 문화, 같은 것이 좀 더 대중화되면 좋을 거야, 이런 말을 남편에게 종종 한다. 남편은 나와 연애를 하며 처음으로 맨몸으로 쏟아지는 비를 맞은 경험이 있다.
우리는 올림픽공원에서 소나기를 만났었고, 나는 어쩔 수 없으니 그냥 뛰자고 했었다. 그러니까 나는, 틈만 나면 우산 없이 쏘다니고 싶은 사람이니 이건 하늘이 준 기회였다. 우리는 지붕을 만날 수 없는 넓디넓은 올림픽공원에서 목적지 없이 일단 뛰었다. 여름이었다.
워낙 진중하고 차분한 성격의 남편은 회사 가방에 365일 우산을 넣어가지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회사 사무실에도 예비 우산이 한 개 더 있는 사람이었고 말이다. 그런 그가 면티가 다 젖도록 서울 한복판을 뛰어다녔다. 그가 깔깔거리고 웃었다. ‘소리 내어' 웃는 게 얼마나 소중한 지 어릴 땐 잘 몰랐는데 이제야 나는 그것의 귀중함을 안다.
우리의 삼 년 남짓한 연애 기간 동안 재밌는 일, 특별한 일이 그래도 몇 개 있었을 텐데, 남편은 연애시절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꼽으라고 하면 언제나 이 날을 고른다. 우산 없이 비 맞는 게 그리도 재밌었을까.
그리도 재밌는 거다.
그러니 다들 해봐야 한다.
다시 비가 오던 오늘로 돌아와서 내가 상가로 어떻게 갔는지 말해야겠다. 비는 점점 거세졌고 몇 없던 행인마저도 어느새 다들 사라져 거리는 빗소리만 가득했다. 스산한 거리를 앞뒤로 살펴보다가 나는 '어쩔 수 없군'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우산을 빌려 쓰고 자시고 할 선택권 자체가 없었다.
나도 <이까짓 거!>의 주인공처럼 "이까짓 거!" 해보기로 했다.
뛰었다.
비를 맞으며 뛰었다.
시원했다. 깨끗해졌다.
목적어를 설명할 수 없이, 시원했고 깨끗해졌다.
뛴 탓에 도착지에는 10분보다 일찍 도착해 버렸다. 생필품을 사고 다시 상가 밖을 나왔을 때는 하늘이 맑게 개어있었다. 아쉽지만 다음 소나기를 기약해야겠다.
“너 우산 없니? 같이 갈래?"
<이까짓 거!>에선 주인공에게 인심 좋은 이웃이 말을 건다. 주인공은 "괜찮아요!"라고 말한다. 이까짓 거!라고 여기는 씩씩하고 명랑한 마음밭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비 한 번 맞아도 괜찮다는 것을 알게 됐으니 주인공 어린이는 적어도 한 달 치만큼의 성장은 다 한 거 아닐까. 다 큰 어른들도 비가 오면 까짓 거, 이까짓 거를 써먹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