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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동 정안맨숀

3_88 담배의 연기

by 금옥

결혼 전 아빠는 군대 대신 사우디아라비아행을 선택하셨다. 그는 사우디에서 몇 년간 일하며 강남 아파트 2채 값의 돈을 시골로 보냈다고 했다.

그가 사우디에서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자신 몫의 돈은 한 푼도 남아있질 않았다.

그의 어머니께서는 다 쓰고 없다는 말씀만 하셨다.


다만 아궁이가 있는 초가집은 멋진 주택 집으로 변했고, 살림살이는 모두 일제 가전제품들로 가득 찼다. 촌 동네에서 일제 가전이 많은 집은 바람댁이 유일했다. (할머니의 택호는 바람댁이었다.)

바람댁은 이역만리 머나먼 타지에서 고생하며 벌어들인 자식의 피와 땀 어린 돈을 한 푼도 그의 몫으로 남기지 않으셨다. 그의 돈은 당연하듯 부모의 몫이었다.


바람댁은 일제강점기 때에 일본에서 부유하게 사셨다. 우체국을 다니시던 할아버지를 만나 결혼을 하시고 시골에서 정착하며 가난을 맞닥뜨렸다. 광복 전 일본에서 부유하게 살던 바람댁은 오랜 세월 가난에 허덕이다 아들이 고생해 벌어들인 돈을 오랜만에 물 쓰듯 쓰셨다.

자식이 해외에서 벌어왔던 돈으로 잠시나마 행복을 만끽하셨을 바람댁은 돈이 화수분처럼 어디에서 나오는지 할아버지와 수시로 여행을 다니셨다. 아빠는 귀향을 해서도 부모님 대신하여 농사를 지으며 시골집을 지키셨다.

효자인 그는 베짱이 같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부양하다 때 늦은 결혼을 하셨다.


29살의 아빠와 27살의 엄마가 만나 결혼을 했다.

엄마는 4년간 조부모님을 모시며 깨달았다.

시집살이도 힘든 일이었지만 농사를 지어 얻는 소득이 전혀 없었다.

이대로는 빚만 생기고 이 시골 촌 구석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란 걸 4년에 걸쳐 그를 설득했다.

그리고 서울로 이사를 그가 마음먹었을 때 엄마는 안도했다.


그렇게 성수동으로 이사를 왔고, 부모님은 시부모님의 도움을 조금도 받지 못하셨다.

그래서 엄마는 서울로 상경하기 위해 시집올 때 가져온 패물과 비상금, 곗돈과 내 돌 반지 모두를 팔아 전세금을 마련했다. 그것도 모자라 1년 치 농사 값을 할아버지께 가불까지 받았다. 그렇게 끓어 모은 돈이 300만 원. 넓은 서울 땅에서 반 지하 방을 간신히 얻을 수 있는 돈 있었다.


1살, 3살 어린 자식들 손을 잡고 반 지하 단칸방에 들어갔을 때 아빠의 마음은 어떠셨을까? 아빠는 부모, 형제에게 헌신했던 자신을 조금이라도 후회하셨을까? 이사 후 엄마는 가불 했던 1년 치 농사 값을 끝내 보내지 않는 것으로 복수를 끝내셨다. 엄마는 그 일만 생각나면 화가 뻗치는지 조용히 아랫입술만 깨물었다.


"결혼하고 4년간 농사지은 삯은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모아서 주신다더니?"


엄마의 말에 그는 조용히 88 담배만 뻑뻑 태우셨다.

담배 연기는 공중으로 올라가 벽지에 들러붙어 누렇게 색을 덧 입혔다.

단칸방은 그새 담배 연기로 가득 차 버렸다. 꽁초가 가득 쌓인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며 엄마에게 비우라 하셨다. 엄마는 조용히 뭐라고 웅얼거리며 밖으로 나가셨고, 아빠는 엄마의 투덜거림을 모른 척하셨다.


그는 부모를 공양하고 형제를 돕는 것이 오랜 사명이었다. 엄마의 옳은 말들은 자신과 부모를 척 지게 만드는 불편함으로 다가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자신의 몫을 한 번도 챙기지 못하고 베풀고 산 사람의 마음이었다.

처와 자식이 생기고 그는 자신의 위치가 다르게 변하는 것에 큰 혼란을 느꼈을 것이다.

결혼하고 우리 남매를 낳고 나서도 수년간 막내 작은 아빠의 대학 등록을 대셨으니까. 엄마는 자기 자식은 유치원도 안 보내면서 막내 삼촌의 등록금을 대냐며 대거리하셨다.


엄마는 해야 할 말을 드디어 참지 않으셨고, 아빠와의 싸움을 피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런 날은 밤늦게까지 엄마 손을 잡고 정안맨숀의 정원을 한참 걸어야 했다. 하늘의 별을 보며 집에 언제 들어갈 수 있을지 생각했다. 엄마는 자주 아랫입술을 깨물었고, 나도 아랫입술을 자주 깨물었다. 우리는 아빠 몰래 조용히 들어와 잠이 들었다. 단칸방에 조용히 들어온다 하더라도 그걸 몰랐을 리가 없다. 특히 잠귀가 밝은 아빠는 모른 척 눈을 감고 잠이든 척했을 것이다.


아빠는 평소처럼 꼭두새벽에 일어나 일을 가시고는 평소보다 일찍 집으로 돌아오셨다.

리고 식지 않게 가슴속에 품은 통닭을 꺼내 화해의 선물로 건넸다. 우린 아빠의 독립을 기다렸고 7살 되던 해 결국 유치원에 갔다. 남들은 5살에 가던 유치원이었다.


그리고 유치원에 가던 그해 슈퍼 패미컴도 사 주셨다. 당시 유행하던 슈퍼패미컴은 인기가 많았고 구하기도 쉽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내가 사 달라고 조르지도 않았고 유행하는지 어떤 지 알지도 못했다. 난 슈퍼 패미컴 보다 세계명작동화가 좋았고, 꽃과 개미 그리고 이끼를 관찰하는 것이 더 좋았다. 그래서 슈퍼 패미컴이 어떤 의미인지 잘 몰랐다. 나중에서 커서 야 슈퍼 패미컴이 아빠의 한 달 임금 값이라는 것은 최근에 안 사실이었다. 자신의 모든 것은 저렴하고 싼 것을 사더라도 자식에게 선물할 게임기는 가장 값진 것이어야 했다.


아빠는 그 값 비싼 것에 사랑을 투영한 것이라고 나는 지금에 서야 생각한다.

내가 가진 것은 모두 정품이었고 그중에서도 최신이어야 했고 가장 비싼 것이어야 했다.

애정 표현 하나 못하는 무뚝뚝한 아빠가 할 수 있는 사랑의 방법은 그런 것이었다.

부모님과 형제에게 헌신하던 삶을 자식에게 돌려주었다.


그 게임기가 어떤 희생으로 나의 손에 쥐어진 줄 그때에는 몰랐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인생에서 아이들에게 어떤 가난한 것도 물려주지 않으려 고군분투하던 그 희생이 나를 키워냈으리라.

젊은 부부가 고단한 생활에도 결코 좌절하지 않은 것은 미래의 우리가.

자신의 자식이 더 나을 거라는 믿음이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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