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유명 관광지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자 평소에 멸종 위기에 있던 동물들이 출현하기 시작했고, 인도 북부에서는 공해로 인해서 평소에 볼 수 없었던 히말라야 산맥이 드러났다. 처음에 우리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만용을 응징하는 것이 코로나가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평소에 한 번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매일 사망자 집계를 보게 되고, 전 세계 곳곳에서 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것과, 넘쳐나는 시체를 처리하지 못해서 전전 긍긍하는 뉴욕시의 충격적인 모습도 보게 되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우리나라가 방역이 잘 된 나라로 손꼽히기 때문이겠지만 생각보다 죽음이 가까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연일 증가하는 확진자 수로 인해서 공포에 떨었지만 실제로 코로나로 죽음에 이른 경우를 주위에서 경험하기는 쉽지 않았다. 아마도 임박한 죽음을 가상 체험하는 임사체험 같은 것이 코로나가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우리 중 대부분은 직접 죽음을 경험하지도, 가까운 이의 죽음을 맞이 하지도 않았지만 죽음의 공포 앞에서 나약한 우리의 실체를 여실 없이 볼 수 있었다. 아직 실체가 파악되지 않은 이 죽음의 씨앗에 대해서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다. 어떻게든지 죽음의 위기를 보잘것없는 마스크 한 장으로 피해보려고 약국 앞에 이른 아침부터 줄 서서 한 장이라도 더 사려고 안간힘을 썼다. 거리에서나 실내에서나 행여 마스크를 쓰지 않은 이는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 했으며, 더러는 욕지거리가 오가고 심각한 실랑이가 벌어졌다는 뉴스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었다. 평생 손 씻는 것에 대해서 이렇게 철저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피치 못해서 공중화장실을 이용하게 되면 반드시 변기 커버를 닦고 앉았으며 외식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명절이 되어도 가족을 보지 못해서 괴로워했고, 사회성이 유난히 부족한 나 같은 사람도 회사에서 하는 회식이 그리웠다. 누군가는 결혼식 하객을 부르지 못해서 넓은 식장에 가족과 친지 몇 사람의 축하를 받아야 했으며, 지인이 상을 당해도 얼마 되지 않는 조의금이 위로를 대신하게 되었다. 교회에서 주일 예배에 참석하면 저마다 떨어져 앉아야 했고, 반가운 사람을 만나도 악수조차 하지 못했다. 같은 공간에서 호흡하는 것이 부담스러웠기에 스승과 제자는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며 대화를 해야 했다. 요양병원에서 병을 다스리던 부모를 오랜 시간 면회할 수 없어서 궁여지책으로 스마트폰 화면을 바라보며 서로의 안부를 물어야 했다.
과연 죽음이 무엇이기에 죽음의 그림자조차도 되지 못하는 코로나를 우리는 그토록 두려워했을까? 우리는 소멸이 왜 그렇게 공포스러울까? 생각해 보면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생물학적 활동이 멈추는 것에 있지 않다. 이 두려움의 근거는 죽음 이후에 벌어지는 관계의 단절이라는 상황에 있다. 내가 죽는 것이 두려운 것은 내 심장이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유발하게 되는 가족들과 지인들의 슬픔에 있다. 반대로 잘 아는 누군가가 죽는다면 위로되지 못하는 나의 슬픔이 두렵다. 인간에게 죽음이란 곧 관계의 단절과 동의어인 샘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죽지 않고도 죽은 생명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살아가면서 따뜻한 관계 하나 만들지 못하고 홀로 살아가는 이는 이미 죽은 삶인 것이다. 좀 더 확장시켜서 생각하면 정말로 살아 있는 사람은 소중한 관계가 많은 사람이다.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에서 사막은 도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표현했다. 도시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그중에 나와 소중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면 그것이 사막인 것이다. 어린 왕자가 장미가 가득한 정원에서 너무나 많은 장미를 만났지만 자신이 떠나온 소행성에 있는 작은 장미와 그 모두를 바꿀 수 없는 것은 서로가 길들인 관계가 그 사이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막에서의 삶은 죽은 삶이다. 죽은 자로 살 것인지, 산 자로 살 것인지는 개인의 선택이지만 관계라는 인간의 숙명을 벗어난 삶이 결코 의미 있거나 행복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