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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을 사랑하는 작가 May 17. 2024

지금은 사랑할 때(隨筆)

지금은 사랑할 때 (隨筆)


                            影園 김인희


지금은 사랑할 때!

하루를 보내고 다시 하루를 맞이했다. 여기저기서 새해가 밝았다고 난리다. 시간의 일직 선상에서 쉼표를 찍은 이는 누구인가. 삼백육십오 개의 별에 특별한 이름을 붙여준 이는 누구인가. 돌고 도는 별들 속에 비집고 나의 궤도를 차지하려고 몸부림친다.


지금까지 걸어온 여정 뒤돌아본다. 한 여자가 걸어온 별거 아닌 길이다.


내가 나고 자란 고향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시골이었다. 겨우내 하얀 눈이 산을 포근하게 덮고 있었다. 부엉이가 우는 겨울밤에 아궁이 불 속에 묻어 두었던 군고구마를 꺼내어 커다란 항아리에서 살얼음을 깨고 꺼낸 동치미와 먹었던 유년시절은 동화와 다름없다. 따뜻한 아랫목 이불속에서 꿀잠을 자고 예쁜 꿈을 꾸었다.


새벽녘이 되면 아랫목이 식어서 살짝 한기를 느끼지만, 곧 따뜻해지는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났다. 아버지께서 가마솥에 소여물을 끓이느라 장작불을 지폈기 때문이었다. 뒤꼍으로 난 부엌문을 열면 장독대 뚜껑마다 새하얀 눈을 소복하게 이고 있었다. 우리 장독대는 엄마가 애지중지하는 엄마의 성지였다. 엄마를 나르시시즘에 푹 젖게 하는 엄마의 비밀의 화원이었다.


내 유년의 봄은 소를 몰아 산비탈 밭을 가는 아버지의 함성에서 가장 먼저 다가왔다. 앞산에서 진달래가 분홍빛 수줍은 미소를 내비치는 것도 뒷산의 뻐꾸기가 봄맞이 노래를 하는 것도 부지런한 농부 내 아버지의 뒤 차지였다. 아버지와 엄마를 따라 논두렁을 뛰어가고 밭두렁을 달려가다가 파노라마처럼 스치는 들꽃들과 풀벌레들은 모두 내 동무가 되었다. 노란 나비를 따라 나풀나풀 춤을 추면서 까르르 웃었던 계집아이가 뒤돌아보면 언제나 아버지와 엄마가 있었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고 아무것도 부럽지 않았던 마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봄이 여름을 초대하고 자리를 비켜 앉으면 엄마 따라 호미 들고 고추밭으로 갔다. 산등성이 길게 늘어선 고추밭 풀을 뽑아내면 그 옆에 있는 콩밭으로 옮겨 앉아 풀을 뽑았다. 콩밭 김매기를 마치면 고추밭에 자라고 있는 잡초를 뽑아야 했다. 마치 악보를 연주하다가 도돌이표를 만나면 그 부분을 반복하여 연주하듯이 내 여름날의 연주는 고추밭과 콩밭을 번갈아 김을 매는 도돌이표였다.


그 고단한 여정 속에서 한 편의 시로 각인된 장면이 있다. 여름밤에 마당에 밀짚으로 짠 멍석을 펼쳐놓고 엄마의 무릎을 베고 하늘을 올려다봤을 때 캄캄한 하늘을 빼곡하게 수놓은 은하수를 보았다. 엄마가 견우와 직녀의 사랑 얘기를 들려줄 때 길게 포물선을 그리면서 별똥별이 떨어지고 있었다. 엄마는 “인희야, 별똥별이 떨어질 때 소원을 말해라. 그 소원이 이루어진단다.”하고 말했다. 그 여름밤의 단상이 지워지지 않는 절절한 그리움이다.


아버지의 대지가 황금물결을 이루는 가을은 감사 그 자체였다. 엄마는 가을을 가장 사랑했던 것 같다. 논에서 고개 숙인 벼가 가을바람에 차르르 부딪히는 소리는 하늘의 소리였다. 고추밭에서 고추를 딸 때 엄마의 감탄사를 잊지 못한다.


엄마는 “인희야, 이 고추 빛깔을 보아라. 어쩌면 이렇게 고울 수가 있을까. 가을바람이 초록색 고추를 빨갛게 물들였단다. 저기 가을 하늘을 보아라. 옥색 호수 같은 빛깔을 보아라.”하고 감탄했다. 나는 “엄마, 힘들지 않아? 여름 내내 김매기에 쩔쩔매다가 이제는 고추를 따는 노동에 시달리는 건데.”하고 푸념을 섞어 대꾸했다. 엄마는 활짝 웃으면서 가을 칭찬을 멈추지 않았다. 해마다 가을걷이를 마치고 아버지는 “올해도 대풍이란다. 너희들은 많이 먹고 무럭무럭 크면 된단다.”라고 육 남매의 기를 팍팍 세워 주었다.


나는 좋은 아버지 예쁜 엄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성장하여 소녀가 되었다. 중학교 시절은 어쩌면 내 삶의 여정에서 가장 그리운 시절인지 모른다. 계집아이가 처음으로 그리움의 빛깔을 배웠던 때였다. 그 소녀 시절에 별을 사랑한 시인 윤동주 님을 만났다. 스물여덟의 청년 시인은 가장 맑고 아름답고 순수했던 별로 내 마음에 각인되었다.


소녀가 그토록 좋아했던 국어 선생님! 국어 수업시간에 예쁘게 꼭꼭 눌러쓴 예습 노트를 펼쳐놓고 선생님께서 내 옆으로 와서 내 수고를 알아주기를 기다렸다. 선생님께서는 수업하면서 자연스럽게 내게로 다가와서 노트를 살짝 톡톡 두 번 쳐서 나만 알아듣는 방식으로 비밀스럽게 칭찬했다.


그 순간 스스로 만족하여 전율했다. 소녀 시절 국어 선생님과 함께 보냈던 두 개의 나이테는 보석상자로 간직하고 있다. 두고두고 그 상자를 뒤적이면서 시를 쓰고 수필을 쓸 것이다. 언젠가는 소설을 쓸지도 모르겠다. 국어 선생님께서 헤어질 때 마지막으로 들려준 “인희야, 수불석권(手不釋卷)해라.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선생님의 마지막 당부를 기억해라.”라는 말씀을 계명처럼 여기고 지켜왔다.


고등학교 시절은 우울했던 기억이 많다. 우선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지 못하고 취업을 위해 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한 것이 슬펐다. 상업고등학교 교과 과정은 대학 진학을 위한 인문계 고등학교와 다르게 취업 위주의 과목을 배웠다.


나는 주산 급수, 부기 급수, 한글 타자 급수, 영문 타자 급수 등 각종 자격증 시험에 매달렸다. 상업계 고등학교에서는 공부를 잘하는 것보다 자격증을 보유하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이었다. 주말에 대전에서 고향에 오는 친구들을 만나면 목마른 사슴처럼 고등학교에서 어떻게 공부하는지 묻곤 했었다. 흔히 여자들에게 여고 시절은 꿈 많은 소녀 시절의 대명사일 텐데 내게는 아름다운 꽃의 그늘처럼 회색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기 위해 상경했다. 경기도 부천시에 거주하면서 인천에서 서울로 가는 전철 1호선을 타고 서울로 출퇴근했다. 전철 1호선은 콩나물시루를 방불케 했다. 부천역에 전철이 도착하고 문이 열리면 빽빽한 사람 속으로 나를 밀어 넣어야 했다. 앞과 뒤에 있는 사람과 양쪽 옆에 있는 사람들이 생면부지이지만 밀착해야만 했었다.


나는 그 전쟁터 같은 삶의 현장에서 독서를 했다. 어쩌다 운이 좋으면 출입문 바로 옆에 비교적 손을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 자리는 자유롭게 책을 펼칠 수 있어서 좋았다. 그 명당자리를 차지하려고 생쥐같이 반짝반짝 눈망울을 굴리면서 기회를 노렸다. 참으로 우스운 것은 매일 같은 시간에 만나다시피 하는 사람들인지라 그 명당자리를 내게 양보하는 아저씨가 있었다는 것이다.


국어 선생님께서 마지막으로 당부했던 한 마디. 수불석권(手不釋卷)! 지금의 나를 만든 일등공신이다. 내 처음 그리움이었던 국어 선생님께서 주신 계명을 지켜내느라 책을 읽었던 것이 나의 가장 큰 콘텐츠가 되었으니 말이다. 내가 늦깎이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 시인과 수필가로 등단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수불석권이 만들어낸 힘이었다는 것을 역설한다.


국어 선생님께서는 이를 노렸을지도 모른다고 미루어 짐작하고 있다. 여전히 책을 끼고 살고 있으니 국어 선생님의 가르침은 내 운명으로 자리매김하였다고 하겠다. 그렇게 만났던 저자와 책의 내용이 고스란히 내 삶에 녹아 스며들었으니 운명을 넘어 숙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다.


꿈은 이루어진다! 꿈을 꾸는 사람들에게 좌우명이 된 문장이다. 나는 꿈은 만들어 가는 것이다! 라고 덧붙이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그 꿈이 이루어지는 여정에서 직시하고 얻은 말이다.


산골에서 시작 노트를 가지고 다닌 계집아이가 소녀가 되고 여인이 되었을 때 시인으로 등단했다. 나는 그 여정에서 시인의 꿈을 놓지 않았고 끝없이 자맥질했다. 긴 시간 동안 책을 읽었고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시인에 걸맞게 공부를 지속했다. 시인의 말과 글은 시인을 고스란히 표출한다고 여겼다. 하여 나는 언행심사(言行心事)를 살얼음판 걷듯이 살피고 돌다리를 두드리는 심정으로 살고 있다.


결혼한 후 현모양처(賢母良妻)를 꿈꾸었다. 한 남자의 착한 아내가 되기 위해 밤낮으로 고민했다. 두 자녀의 지혜로운 엄마가 되기 위해 삼백육십오일 긴장의 끈을 단단하게 조이고 지냈다. 그 남자가 시댁과 지인들에게 가장 행복한 남자라는 칭송을 듣고 있다. 두 자녀가 성인이 되어 딸은 아빠 같은 남자를 배우자로 만나고 싶다고 고백하고 아들은 엄마 같은 여자를 배우자로 만나고 싶다고 했을 때 나르시시스트가 되어 춤을 추었다. 그 남자 어깨에 힘주고 당당하게 활보하고 두 자녀는 국가와 사회의 인재가 되었으니 무엇을 더 바라랴.


지금이 나에게 주는 최상의 선물이다. 부모님께 기쁨을 드리는 효녀가 되고 싶었다. 남편에게 착한 아내가 되어 주고 싶었고 자녀에게 똑똑한 엄마를 선물해주고 싶었다. 시어머니께는 따뜻한 며느리가 되어드리고 싶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 몸부림치면서 지냈다.


참으로 고단하게 걸어온 길에 꽃이 피고 나비가 날았다. 더러 소나기 내리고 폭풍우가 들이닥친 날도 있었지만, 그 모든 것들이 하모니를 이루었다고 자부한다. 인생사 햇살만 따사롭게 비춘다면 꽃이 지고 열매 맺는 일이 있으랴. 꼬투리 안에 열매가 영글기 위해서 바람이 흔들어 주고 캄캄한 어둠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은 사랑할 때!

文學은 내 이상형이다. 문학을 북극성 삼아 오롯이 걸어온 길이다. 하여 문학은 내 호흡이고 내 운명이라 해도 한치 어긋나지 않는다. 詩題를 붙잡고 몇 날 며칠을 되새김질한다. 그러다가 섬광처럼 찰나에 빛나는 어휘가 생각나면 컴퓨터를 켜고 편린을 불러보아 이리저리 자리를 찾아주고 퍼즐을 완성한다.


더러는 잠을 자다가 떠오르는 영감을 메모하기 위해 이불에서 빠져나올 때도 있다. 분주한 일상에서 동분서주하다가 모두 잠든 시간에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시간은 거룩한 시간이다. 내가 가장 나답게 빛나는 시간이다. 내가 가장 행복할 수 있는 시간이다.


나는 나를 사랑하기로 한다. 지금까지 세상을 향해 차마 열지 못하고 빗장을 고정한 채 소녀의 순수를 간직한 방을 고수할 작정이다. 세상의 조류에 걸음을 맞추지 못하는 불치를 그대로 사랑하기로 한다. 나는 계속 착하고 따뜻하게 살고 싶다.


내가 힘든 일을 당했을 때 지인들이 착해서 당하는 것이라고 충고를 주었지만 그래도 착한 내가 좋다. 선한 끝은 있다고 하지 않는가. 책이나 드라마에서도 착한 사람은 반드시 복을 받았다. 나도 착하게 살면서 복을 많이 받고 싶다. 나의 언행심사가 곧 나의 콘텐츠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에게 더 좋은 자양분을 주어서 한 단계 높은 경지에 나를 두고 싶다.


내가 걸어온 여정에서 만난 별이 있다. 그 별을 따라 걸으면서 그 빛과 그 향기에 매료되었다. 그 별을 닮기 위해 끝없이 발돋움하다 보니 이만큼 성장했다. 나도 누군가의 별이 되고 싶다. 내가 걸어온 길에서 만난 작은 꽃의 사연을 들려주고 옷깃을 여미게 하였던 바람의 심술을 에피소드로 들려주고 싶다. 나그네의 겉옷을 벗긴 것은 세차게 불었던 바람이 아니라 소리 없이 따뜻하게 내리쬐던 햇살이었노라고 말해주고 싶다.


내 머리 위에 흰 눈이 살포시 내리는 내 인생의 가을이 오면 후배들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살리라. 내 입에서 나오는 말과 내가 쓰는 글에 향기가 스며들 수 있도록 바르게 살리라. 내가 사랑한 시인처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고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리라.


멀리 가로등 불빛이 반딧불처럼 반짝이는 겨울밤. 작은 별 하나 창가에 바짝 다가와서 엿보는 밤이다. 반 평도 안 되는 공간에 앉아 가장 따뜻하고 부드러운 언어로 詩를 써야 할 시간이다. 지금은 사랑할 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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