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깎이 야구광의 일기

독수리여 비상하라

by 두번째 갈래

서울에서 먹고살기 바쁜 집안에서 태어난 탓일까. 야구장은 대학생이 되어서야 처음 가봤고, 마흔이 넘도록 '야구'란 내 인생 사전에 등재되지 않은 단어였다. 일본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 동생이 두산 베어스에 빠져 집안에 유니폼과 사인볼을 쌓아놓을 때도, 나는 그저 남의 일 보듯 무심하게 지나쳤다. 남들 다 미쳐있던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도 큰 흥미가 없던 나였다.

물론 텔레비전 마니아이긴 했다. 할 일 없는 방학이나 주말 대낮, 마룻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멍하니 채널을 돌리다 청룡기니 봉황기니 하는 고교 야구를 본 적은 있다. 하지만 그건 흥미라기보다 무료함을 달래는 백색 소음이었다. 내게 야구란 그저 술 취한 아저씨들의 고성방가가 난무하는 날 것의 풍경, 혹은 '3S 정책'이라는 낡은 시대의 유산, 딱 그 정도였다.

그러나 사람 일 모른다고 했던가. 방바닥에서 멍하니 고교 야구를 보던 나는 30여 년이 흐른 후, 홍콩에서 재택근무를 하다 틀어놓은 유튜브 영상에 제대로 발목을 잡히고 말았다.


시작은 예능 프로그램 <최강야구>였다. 기적적으로 프로 데뷔에 성공한 한 선수의 서사. 평소 스스로를 ‘언더독(Underdog)의 아이콘’이라 자부해 온 나는 그 치열한 생존기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저 선수, 프로 가서 잘하고 있나?" 하는 단순한 호기심은 검색으로 이어졌고, 유튜브 알고리즘은 나를 자연스럽게 프로 야구계의 진정한 언더독, '한화 이글스'로 인도했다.


해외 생활 17년 차. 한국, 미국, 일본의 모든 드라마를 섭렵해 더 이상 미디어가 주는 도파민에 반응하지 않던 권태로운 시기였다. 그런 내게 야구는 마르지 않는 새로운 화수분이었다. 꼴찌를 겨우 면하는 성적, 새 감독의 부임, 그리고 여전히 아슬아슬한 경기력. 2024년 여름의 한화는 짠내 나는 야구를 보여주었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이미 그 불완전함에 매료되어 있었다. 뒤늦게 배운 도둑질이 날 새는 줄 모른다더니, 앱 하나만 깔면 실시간 중계를 볼 수 있는 세상은 나를 늦깎이 야구광으로 만들었다. 룰? 복잡할 것 없다. 던지고, 치고, 달려서 집으로 돌아오면 점수가 난다.


"언니, 보크가 뭔지는 알고 보는 거야?" 야구 선배인 동생의 핀잔도 내 열정을 막지는 못했다. 뜬금없이 문학구장에 가자고 조르고, 일곱 살 조카에게 유니폼을 입혀가며 '세뇌 교육'을 시켜도 동생은 웃어넘겨주었다. 덕분에 조카도 반쯤 한화 팬이 되었으니, 가족 모두가 나의 늦바람에 장단을 맞춰주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한 시즌을 보내고 새로운 2025 시즌을 준비하며 시범경기부터 챙겨보기 시작했다. 딱히 할 일 없는 독거 중년에게 일주일에 여섯 번 경기를 하는 야구는, 배우 조인성의 표현을 빌리자면 '주 6일 만나는 친구와의 저녁 약속'이 되어주었다. 야구를 보며 알게 되었다. 야구는 우리 삶과 참 많이 닮아있다는 것을.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는 명언부터, 회사에서 밥 먹듯이 쓰는 "어림잡아(Ballpark figure)", "예상치 못한 난관(Curveball)" 같은 표현까지. 한국어뿐만 아니라 영어에서도 야구는 이미 내 일상 곳곳에 녹아 있었다.


주 6일의 야구는 매일 새로운 스트레스와 카타르시스를 동시에 선물했다. 8회 말 포기하지 않고 역전 쓰리런을 쳐낸 선수의 유니폼을 주문하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까지 빠져드는 걸까. 원래 무엇에든 금방 불타오르고 금세 식어버리던 내가, 3월의 쌀쌀한 시범경기부터 11월의 뜨거운 한국시리즈까지 눈물로 지켜보게 될 줄이야. 혹자는 야구가 주는 가장 큰 행복은 '소속감'이라고 했다. 항상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은 인간의 본능.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사는 내가 한 팀을 응원하며 같이 울고 웃는 그 과정에서, 비로소 '우리'가 되는 행복을 느낀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야구歷1년을 갓 넘긴 병아리 팬이지만, 그 말의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다. 내년엔 우승하자, 이글스야. 늦깎이 야구광의 일기는, 아니 우리의 시즌은 이제 시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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