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뇌훈련 시키기
손자보다는 동생으로 조카로 더 많이 불리는 외손자와의 오목 대결에 두 사람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할아버지랑 오목대결은 재미없다면서도 할아버지의 정신건강을 위한 두뇌훈련에 동참해 달라는 엄마의 부탁을 거절 못하는 착한 아들이다.
몇 개를 연거푸 먹히고 나면 그다음부터 생각 없이 돌을 아무 곳에나 놓지 않고 제법 머리를 굴리면서 놓다 보면 5대 1 정도는 아버지의 승리로 끝난다. 대 성공이다. 사뭇 진지한 눈빛으로 집중해 오목을 두는 모습이
조손관계가 아닌 다정한 친구사이 같다. 자꾸 규칙을 잊어버리고 한 칸 이상 이동하면 안 된다고 억지를 부리 시기도 한다.
아들은 나를 보며 져 드려야 하냐는 눈치를 보낸다. 나는 고개를 흔든다. 일부러 져 드리면 두뇌를 쓰지 않으시기에 할아버지의 뇌훈련에 도움이 안 된다고 몰래 일러준다.
지금 누구랑 오목을 두고 있냐고 물으면 선뜻 말씀을 못하신다. 아버지 딸이 낳은 아들이라 해도 말씀을 못하시고 머뭇거린다.
그러면 안달이 난 나는 아버지 딸은 어딨냐고 하면 또 머뭇거린다. "제가 딸이잖아요. 저 애는 제가 낳았고요." "아.. 안다. " "그럼 얘와 아버지와는 무슨 관계죠?" 라고 물으니 짜증 섞인 톤으로 "몰라, 알면 뭐 할 거냐?"라고 해 한바탕 폭소를 터뜨린다. 모자의 웃음소리에 민망함과 당황함이 살짝 스치며 "아는데 네가 어떻게 하는지 보려고 모른 척해봤다. " 고 하신다. 아버지의 상태를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깜박 속을뻔한 유머 아닌 유머에 또 한 번 폭소를 터뜨린다.
이렇게 한바탕 웃고 난 후의 뒤끝은 언제나 씁쓸하다. 5년 전 추석날에 아들과 함께 아버지를 찾아뵙고 일어서려는 찰나, 손자에게 용돈을 주려고 주머니를 뒤적이실 때, 그냥 두시라며 도망치듯 나와 아파트 입구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13층에서 베란다 창문을 열고 손자 이름을 부르는가 싶더니 아버지가 날린 오만 원권 지폐 한 장이 나비처럼 팔랑팔랑 날아서 화단에 사뿐히 앉는 게 동화 속의 한 장면 같다는 생각이 짧은 순간에도 스쳤다. 지폐를 주우며 가슴이 왠지 아려왔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일주일 남짓한 시간이 흐른 뒤였다. 나에게도 제수 음식하느라 고생했다며 따로 30만 원이 든 봉투를 주셨다.
아내가 하던 일을 딸이 이어받은 걸 미안해하고 고마워하셨다. 그때가 그립다.
가부장적이고 엄한 아버지였지만 자상하고 따뜻한 면도 지니셨던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에 미치자 심장을 난도질당한 듯한 통증이 밀려온다.
그렇게 손자를 챙기고 좋아하셨는데 이제는 그 손자를 알아보지 못할 때가 더 많다. 손자가 며칠 집에서 머물면 "왜 저 사람은 집에 가지도 않냐? 우리가 먹여 살려야 하냐 "며 눈엣가시로 여기신다.
엄마가 살아계실 때도 아버지는 침대보다 거실바닥이 편하시다며 거실에서 주무셨고 엄마는 안방에서 주무셨다. 내 아들이 와서 한동안 머물 때는 나와 함께 안방에서 잔다. 어차피 침대도 2인용이고 방하나는 드레스룸이고 또 다른 방은 자주 안 쓰는 잡다한 물건을 두는 창고 용도로 사용하다 보니 아들이 침실로 쓰기에는 공간이 좁아서이다.
밤중에 찌이익 하며 슬그머니 방문 여는 소리에 선잠이 깨어 문쪽을 바라보면 미세한 방문 틈새로 들여다보고 앉아 계실 때가 종종 계신다. 그러면 아들도 잠결에 "할아버지가 외간 남자랑 잔다고 생각하셔서 감시 중이시다." 하며 귓속말로 해온다. "네가 엄마랑 할아버지 맘을 동시에 읽는구나." 라며 둘이서 키득거린다.
화장실에 가고 싶어도 문 열고 나오다가 마주치면 민망해하실까 봐 자리로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리면 한 시 간고 두 시간이고 버티고 계실 때가 많다. 도저히 못 참아 헛기침을 하고 나오면 순식간에 기어서 이부자리에 누우시는 모습에 침묵의 폭소로 배꼽을 잡는다. 평소에 거동이 잘 안 되고 식탁의자에도 겨우 앉으실 때가 많은데 빛의 속도로 도망치시는 모습이 놀랍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다.
또 한 번은 밥을 남겨 몇 번 버린 뒤로는 드신 후 더 드시라며 반공기만 드렸더니 잠시 한눈파는 사이 조금 더 양이 많은 내 밥그릇과 바꿔치기한 후 드시고 계신 모습이 웃음과 슬픔을 동시에 준다. 불과 1-2분 전에 "내는 조금만 먹어도 되니 내 돌보느라 힘들 텐데 너나 많이 먹고 건강해라."라고 말씀하셨는데 말이다. 분명 과거에도 현재에도 변함없는 내 아버지인데 영혼이 빠져나간 껍데기만 남은 것 같아 슬프고 슬퍼서 목이 멘다.
맑은 정신일 때 좀 더 빨리 모시지 못한 것에, 아버지와 좀 더 많은 시간을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과 후회가 밀려온다.
아버지의 기억력 저하가 더 이상 진행되지 않기만을 바라고 바랄 뿐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행복한 일만 쏟아지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