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다 이룬 꿈
내가 초등학교 1학년때 최초로 구구단을 익힌 대상은 아버지로부터였다. 밤에 새끼줄을 꼬시면서 " 자, 현아 따라 하거라.
2 ×1 =2
2 ×2 =4....
밤의 적막을 깨고 낭낭히 울러 퍼지던 부녀의 목소리가 아직도 영화장면처럼 생생히 오버랩되었다 사라진다. 몇 날며칠을 늦은 밤까지 쏟아지는 잠으로 절로 감기는 눈을 비벼가며 따라 하는 내내 아버지가 원망스러웠지만 그 덕에 완벽히 구구셈을 익힐 수 있었고, 방과 후 다른 친구들 절반은 학교에 남아야 했었는데 나는 그 집단에서 제외되는 영광을 누렸다.
종종 틀린 산수 문제를 다시 풀어 아버지께 검사를 맡고 통과한 후에야 잠을 잘 수 있었던 만큼 아버지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한 번은 우리 남매들을 불러놓고 오래된 박스 하나를 꺼내어 개봉을 하신 적이 있었다. 그 안에서 쏟아져 나온 것들은 놀랍게도 아버지가 국민학교 시절에 받은 우등상장들이었다. 누렇게 퇴색된 상장들이 차곡차곡 포개어 있었다. 라면상자만 한 크기에 가득 채워진 상장은 어림짐작으로도 7. 80 여 장은 족히 될 듯했다. 당시 그 어마어마한 양에 놀랐고 수십 년을 신줏단지 모시듯 간직해 온 것에 또 한 번 놀랐다. 그날 이후로 아버지는 내가 감히 가까이 갈 수 없고 바라볼 수도 없는 아득하고도 높은 하늘이었고 우상이었다.
시대를 잘 못 만나 타고난 재능을 제대로 발휘해 보지 못하고, 쓰임 받지 못한 채 처참하게 사장돼 버린 아버지의 천재성이 아깝고 안타까운 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6.25 전쟁세대로서 당시엔 지역유지 이거나 대대로 천석꾼 집안이 아니면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시절이었음을 누구나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먹고사는 게 가장 큰 과업이었기에 학업에 뜻을 둔다는 건 당시로선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아버지도 원대한 자신의 꿈이 꺾인 것이 두고두고 한으로 남아 있으신 듯했다. 당시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담임선생님이 할아버지를 찾아와 이대로 시골바닥에서 소나 키우며 살기에는 재능이 너무 아깝다며 저에게 맡겨만 주신다면 ×× 이를 책임지고 공부시켜 큰 인물 만들어 보겠노라고 오히려 그쪽에서 사정사정을 하셨는데도 할아버지는 요지부동이셨다고 했다. 그 뒤에도 몇 번씩이나 찾아와서 사정해도 끝내 거절하셨다 했다.
그래도 끝까지 아버지는 중학교 진학의 꿈을 포기할 수 없어, 야반도주를 했다고 하셨다. 부산의 전통 시장에서 장사를 해 엄청난 재력가가 된 나이차가 많이 나는 사촌 형에게 가서 자신의 사정 이야기를 하니 흔쾌히 받아주며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 원 없이 하게 도와주겠다며 같이 살자고 했다 한다. 그러나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수소문 끝에 거기까지 쫓아온 할아버지께 붙잡혀 영영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기억이 희미해져 가는 지금까지 얼마나 깊고 깊은 한으로 박제되었으면, 70년도 더 된 옛날일을 어제 일처럼 또렷하게 기억해 내며 원망 어린 푸념을 늘어놓으신다. 아버지가 한없이 불쌍하고 안타까워 괜히 성질 나서는 도대체 할아버지가 거절한 이유가 뭐였냐고 물으니 남에게 민폐를 끼치는 일은 죽어도 할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어떻게 아버지가 되어서 자식을 도와주지는 못할지언정, 도리어 자식의 인생을 망칠 수가 있냐고. 본인이 능력이 안돼 뒷바라지를 못할 형편이면, 인재를 알아본 하늘이 나서서 도와주려나 보다 하고, 그분 도움을 감사히 받아들여야지.
이담에 잘 풀려서 그 몇 배로 갚아드리면 될 것을. 아무리 무식해도 그렇지 하나밖에 없는 아들한테 어떻게 그리 무심할 수 있냐"며 목청 높여 격분하자, 아버지는 딸한테 괜한 소리를 해 열 올리게 했다는 듯 약간 난처해하면서도, 내심 본인 편을 들어주니 후련하고 흡족한 표정을 지으셨다.
아버지는 늘 빠듯한 살림에도 우리 5남매들한테 너희들은 내가 길거리에 나앉아 구걸을 하는 한이 있어도, 대학은 물론이고 누구든 원한다면 미국 유학도 보내주마. 라며 자식들에게만큼은 못 배운 설움과 한을 전가시키지 않으려고 평생을 무던히도 애쓰며 고단하게 사셨다.
지금은 아들 한 명은 유명을 달리했지만, 당시 5남매를 아버지의 약속대로 대학까지 당당히 졸업시킨 부모님의 무조건적인 자식 사랑과 노고에 숙연해지고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아버지, 후생이 있다면 그때는 꼭 제 아들로 태어나 주세요. 이생에서 못다 이룬 꿈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게, 제가 날개를 달아 드리겠습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