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 내 생일을 한번 들으면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한다. 아니 일부러 잊으려고 해도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도 아무도 기억을 못 하는 날이기도 하다. 그리움과 설레는 마음 가득 품고 고향을 향해 범국민적인 이동이 이루어지는 날, KTX를 미리 예매하지 않으면 품귀현상이 빚어지는 날,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인 설날, 그 축복의 날이 바로 내 생일이다.
차례상이 곧 나의 생일상으로 둔갑한다. 아주 어렸을 땐 그래도 할머니가 "오늘 현이 네 생일이니 많이 먹어라. 임금님 수라상이나 진배없으니 먹을 복은 타고난 게다." 라며 덕담을 던지셔서 으쓱하기도 했다. 그런데 초등학교를 입학한 후부터는 누구 하나 내 생일을 거론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른이 되었을 때도 그 흔한 케이크에 초 꽂아 축하노래 불러주는 사람도 없었다. 서러웠다. 나이를 먹어가면서는 케이크는 체념했다. 그냥 관심 가져주고 기억해 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생일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만 해 주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기억하고 챙겨주는 사람이 없어 우울하고 슬펐다. 내 아이들한테 설날 전날에 내일 아침에 생일 축하노래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만 해 달라고 해도 막상 당일만 되면 기억상실증에라도 걸린 듯, 능구렁이 담 넘어가듯 고요하기만 했다.
가끔씩은 "그냥 내가 케이크 사다가 촛불 켜고 노래 부르고 혼자 다 먹어 치우는 원맨쇼라도 해볼까"도 생각했지만 케이크를 못 먹어 환장한 사람 같고 오히려 씁쓸하고 우스운 상황이라 머릿속으로 상상한 했지 실행해 본 적은 없다.
평소에 먹는 케이크와 생일 때 축하받으며 먹는 케이크는 기분부터 다르고 차원이 다르지 않은가?
친구와 지인들이 생일을 물은 적이 있었다. 설날이라고 하면 처음엔 거짓말 말라며 믿지도 않았다. 기 막히게도 그런 생일이 어딨냐는 핀잔까지 들어야 했다. " 듣자 하니 기분 나쁘네. 설날에는 사람이 태어나면 안 되는 날이니? 전 세계적으로 1초에 4.3명 하루 12만 명이 탄생하고, 한국인만도 하루 713명이 태어난대 " 라며 웃고 넘겼지만 매번 묘하게 침울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20대 때 직장에서 직원들끼리 회비로 서로 생일을 챙기는 모임이 있었다. 부장님은 며칠 차이로 아들의 돐이 끼어서 따로 돈을 거둬 돐반지를 생일 선물로 챙겨 드렸더니 입이 귀에 걸린 모습을 보고 약간 부러웠다. 집에 초대하는 동료도 있었지만 대부분 회비로 외식비를 충당해 부담도 없어 너무 좋았다. 그런데 막상 나 차례는 돌아오지 않았다. 다들 명절 연휴로 고향에 가기 바빴으니 내 생일 따위는 안중에나 있었겠는가? 회비는 떡 사 먹은 걸로 치더라도 나는 영원히 생일 축하는 못 받는 팔자 사나운 여자라는 걸 뼛속깊이 절감하는 시절이었다.
죽어도 바뀌지 않을 상황이니 내 이념과 관점을 바꾸기로 했다. 해마다 까치설날이면 차례음식을 장만하는 게 아니라 세상에서 제일 화려하고 진수성찬인 내 생일상을 차리기 위해 기쁜 마음으로 마트로 향하기로 말이다. 손수 장만한 1등급의 국산 재료로 생선을 굽고 전을 부치고 탕국을 끓이니 서운할 것도 서러울 것도 없다. 차례상이 내 생일상으로 둔갑하는 순간 첫 숟갈을 뜨며 속으로 축하 노래를 부르고 "현아 많이 먹어"라며 자축을 한다.
평범한 날에 태어났다면 더더욱 누구 하나 기억도 못할 내 생일을 명절에라도 태어난 게 천만다행이라면 다행이지 않은가? 그리고 내 생일에 내가 정성으로 만든 음식을 가족들이 맛있게 먹고 건강하고 행복한 한 해를 출발한다면 이 또한 축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여러분은 생일에 행복하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