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님 잘 잤습니까?
따스한 아침 햇살이 방안 가득 스며들 때,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와 아직 침대에서 뒤척이는 내 발을 감싸 쥐며, "사모님 잘 잤습니까?" 하시는 아버지의 위트 있는 농담에 나도 모르게 "푸핫 " 웃고 말았다.
고지식하고 보수적인 아버지는 딸한테 지금껏 이런 농담을 한 적이 없었고 하실 분도 아니었기에 의아했다. 농담을 던진 사람치고는 너무나 순수하고 해맑은 표정으로 엉거주춤 굽은 허리로 내려다보고 계셨다.
아니 농담이 아닌가?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하고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며 "제가 누군데요?" 하고 되물으니 빤히 보다가 말없이 거실로 나가버리신다. 뒤따라가서 등 뒤에 대고 다시 한번 더 "제가 누군데요." 하고 물으니 "몰라" 하신다. " 잘 생각해 보세요. 사모님이 예요?" " 아니 "그럼 요양사예요?" "아니" "그럼 누군데요.""조카가?"
" 딸이잖아요. 딸도 몰라보냐고요."
" 아 그렇나?" 하신다. 충격에 한동안 멍하니 일손이 안 잡히고 화가 솟구쳤다가, 두려움이 목을 조이는 듯 해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시술한 아버지의 허리뼈가 회복하려면 족히 석 달은 걸릴 것이고 회복한다 해도 이미 90°로 꺾인 허리와 기력이 쇠해질 대로 쇠해져 숟가락 들 힘조차 버거운 아버지가 혼자 생활하기는 어려워 요양원에 모시든 자식 중 누군가가 모시든 선택의 기로에 섰다.
아버지의 연세가 지금의 내 나이보다 세 살이나 더 어렸을 때, 생때같은 둘째 아들을 어어 없게도 한순간에 고통사고로 잃고, 빛 하나 스며들지 않는 죽음 같은 캄캄한 동굴 속에서, 절망과 고통으로 얼룩진 잔인한 세월을 온몸으로 맞서고 감내해 왔을, 불쌍한 내 아버지를 요양원으로 보낼 수는 없었다.
3남매 중 유일한 딸인 내가 총대를 멜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아버지를 모시겠노라고 아버지가 흡족하실 만큼은 모시지 못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해 모시겠노라고 선언했다. 대놓고 표현은 안 했지만 오빠와 동생들은 난해한 숙제 하나를 해결한 듯 내심 반기고 안도하는 눈치였다.
장남인 오빠가 입원하기 전에 요양원에 가실 마음은 없냐고 슬쩍 운을 떠 봤더니 딱 잘라 거절 의사를 표하셨단다. 다른 형제들은 다들 직장생활을 하고 있어, 당장 끼니를 챙겨 드릴 사람이 없으니 집으로 모셔간다는 건 여건상 불가능했다.
지금까지는 고맙게도 막내 남동생이 일주일에 한 번씩 아버지댁을 찾아 밀린 빨래가 담긴 세탁기와 청소기를 돌리고 한 끼라도 정성껏 식사를 챙기는 수고로움을 묵묵히 해왔다. 그 나머지 날은 요양보호사가 일주일에 5일을 하루 세 시간씩 와서 청소와 아침 한 끼의 식사를 챙겨드리고 두 끼는 바로 꺼내 드실 수 있게 밥은 전기밥솥에 반찬과 국은 냉장고에 챙겨놓고 가는 정도였다.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의 실태는 굳이 매스컴이 아니더라도 주위의 편견과 시선이 곱지 않은 건 사실이다. 난폭한 노인에게는 손발을 결박시킨 채 수면제를 먹여 재우고, 대소변을 못 가리는 노인에게는 이물질로 항문을 틀어막고 폭행을 일삼는 요양원 관계자들의 충격적인 민낯을 TV 뉴스로 접한 사실 때문에 내가 아버지를 모시려고 한 이유는 아니었다.
얼마 전 알고리즘을 타고 들어간 유튜버에서 하나부터 열 가지의 제재나 규칙에 갇혀 숨 쉴 수조차 없는 감옥 같은 요양원을 목숨 걸고 탈출한 노인이 산속으로 들어가 자연인으로 살아가면서 이곳이 천국이라 말하는 그의 스토리를 접한 후 생긴 심경의 변화 때문만도 더더욱 아니었다.
다만 사회 곳곳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는 이런 극악무도한 사건 사고와 추태들이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고 내 가족이나 먼 훗날 나도 그 주인공이 될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을 피부로 체감한 건 사실이다.
물론 목숨 걸고 탈출을 시도했다는 극한 상황은 일부 요양원이라 믿고 싶다. 대부분은 원장과 요양보호사 그리고 여러 사회단체에서 투입된 봉사자들의 세심한 보살핌과 잘 짜인 커리큘럼 속에서 안정적이고 편안하며 즐거운 요양원 생활을 하는 노인들도 많으리라 본다.
그러나 다 차치하고 서라도 내 배우자 내 자식과 함께 울고 웃으며 수 십 년을 쌓아 온 따뜻하고 끈끈한 정과 사랑으로 이어진 돈독한 유대감에서 서서히 멀어진다는 것, 그러다 정신적 지주로 버텨오던 그 실낱같은 유대감이 노인들의 가슴에 깊은 생채기만 남긴 채, 실타래 끊어지듯 툭 하고 허망하게 끊어지고 만다는 사실은 슬픈 일이다. 그것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 불가능한 공허감과 상실감으로 이어질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므로 생의 마지막을 가족들의 따뜻한 보살핌과 사랑 속에서 지내다 그 따뜻한 온기와 추억을 가슴에 품고 마음 편히 하늘로 의 먼 여행을 떠나게 하고픈 마음 그것 하나뿐이다.
못 먹고 못 입고 여행 한번 마음 편히 못해보고 오로지 자식의 양육과 교육에만 전념하고 헌신하며 앞만 보고 달리다 장성한 자식들이 모두 제 둥지 찾아 뿔뿔이 떠나고 난 후, 그제야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했음을 깨달음과 동시에 한시름 놓는다.
이제 자식 걱정에서 벗어나, 제대로 오롯이 나를 위해 살아보려는데 여기저기 아파오고 육신이 말을 안 듣는다. 그러다 반세기를 함께해 온 배우자를 먼저 떠나보내는 우울감과 상실감의 늪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다 그대로 병마가 덮치기도 하는 게 우리네 허무한 인생이 아니던가!
아버지의 이런 이상 증세는 병원 이외의 장소에서 처음 겪은 일이라, 더욱 충격이 컸다. 의사가 섬망 증상이라고 집에 가면 회복할 거라고 했을 때 뭔가 꺼림칙했는데 그대로 치매로 이어지는 건가? 젊은 시절 유독 계산력에 밝았던 아버지는 은행 측의 계산 착오로 삭감된 적금통장의 이자도 치밀하고 완벽한 근거로 계산의 달인인 은행원을 제압시키고 기어이 받아내시던 명석한 두뇌와 기억력을 자랑하던 아버지였다.
잠결에 목격한 그 사건으로 그대로 주저앉아 통곡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토록 크고 강하셨던 아버지를 이토록 나약하고 초라하게 만든 세월이 원망스럽고 야속했다.
그 순간 내 눈앞에 신이 있다면 옷자락이라도 붙잡고 매달리고 싶었다.
신이시여, 저희 아버지의 기억을 돌려주소서. 그리해 주신다면 뭐든 다 하겠나이다. 제 기억의 반에 반이라도 도려내어 저희 아버지의 뇌리에 심어 주소서.
저는 이제 어찌해야 하옵니까?
신이시여, 제가 가야 할 길을 인도해 주소서.
신이시여.. 신이시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