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남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모양이야
어릴 적 나는 유독 엉뚱한 아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관심 있는 것 외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관심을 표하지 않는 것들은 대개 세간에서 중요하다고 부르는 것들이었다. 생일, 집주소, 부모님 전화번호 등등……
아무리 선생님이나 부모님이 어르고, “그건 꼭 기억해 놔야 돼!”라며 으름장을 놓아도 좀처럼 외우질 못했다. 의지가 부족하거나 그런 건 아니었던 것 같다. 내 나름대로는 외우려고 열심이었다. 스케치북에 열심히 쓰면서 외우기도 하고, 혼자서 생년월일과 번호를 중얼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면 그런 것들은 지우개로 박박 지워낸 것 마냥 하얗게 바래고,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그것들이 지워지고 나서 남은 빈자리는 나에게 ‘더 중요한 것’들로 채워졌다.
전에 읽었던 그림책에 참새가 몇 마리 그려져 있었는지?
할머니 주름살은 산 모양인지, 물결 모양인지?
어떻게 하면 비눗방울을 예쁘게 불 수 있는지?
어른들은 그걸 듣고 “에이, 그런 건 나중에 봐도 돼! 그것보다 전에 외우라고 한 건 다 외웠니?”라고 핀잔을 주기 일쑤였지만, 나는 그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머릿속을 차곡차곡 채워 나갔다. 그러면 묘하게 슬픈 반발심이 울렁거렸다. 다른 어른들도 서로 싸우지 말고 나처럼 그림책을 보면서 사소한 것에 꺄르륵 웃으면 좋을 텐데, 더 중요한 것은 분명 우리들 가까이에 있는데… 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나는 내 나름의 중요함을 어른들에게 전파해 보기로 했다. 당시 비눗방울에 푹 빠져 있었던 나는, 때마침 <스펀지>라는 TV 프로그램에서 절대 터지지 않는 비눗방울을 만드는 방법을 알게 된 것을 계기로 그걸 어른들에게 알려주자고 마음먹었다. 재료도 근처 약국에서 쉽게 살 수 있었으므로 나는 곧장 화장실에서 실험에 착수했다.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후우, 가볍게 불자 제법 커다란 비눗방울이 맨들맨들한 타일 바닥 위로 퐁 떨어졌다. 놀랍게도 그 비눗방울은 암만 발로 밟아도, 코앞에서 거센 입김을 불어도 터지기는커녕 멀쩡하게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혼자 흥분의 도가니 속에서 “아싸!”하며 팔을 들어 올리면서 이거라면 선생님이나 부모님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신기하다고 말할 게 분명하다고 확신했다.
이 빅뉴스를 제일 먼저 누구에게 알려줄지 고민하며 화장실 안을 서성이던 중, 아무도 없는 거실에서 전화가 울렸다. 수화기를 덜컥 집어 들자 건너편에서는 모르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로 보건대 어머니와 비슷한 나이대의 아주머니였다. 아주머니는 상냥한 목소리로 “안녕하십니까~ ○○ 보험회사에서 연락드렸습니다~”라고 말했다. 묘하게 늘어지는 말투와 처음 듣는 목소리에 당황한 나는 “누구세요?”라고 되물었다. 그러자 상대방은 잠깐 침묵하더니 다시 또박또박 자기소개를 반복했다.
“네에, 저는 ○○보험회사의 ○○○라고 합니다. 혹시 집에 어른 계시나요?”
“안녕하세요, 저는 린이에요. 엄마는 할머니 집 갔고 아빠는 일하러 갔어요. 동생은 아마 놀고 있고, 어디 갔는지는 몰라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어른이 계시면-”
내가 말이 안 통하는 아이라는 걸 알자 상대방은 곧장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 그때 나는 급한 마음에 그녀의 말을 끊고 이렇게 외쳤다.
“저기, 이모. 비눗방울 만드는 법 알려드릴까요?”
그러자 상대방은 잠깐 당황한 듯 말을 멈추더니 “비눗방울이요?”하고 되물었다. 그 반응을 보고 나는 신이 나서 조잘거렸다.
스펀지에서 비눗방울 만드는 법을 봤는데 이렇게 만들면 엄청 쎈 비눗방울을 만들 수 있다, 직접 해보니까 절대 안 터지더라, 아주머니도 궁금하면 알려 줄 수 있다, 만드는 방법도 쉽다 등등… 저걸 전부 다 들어준 걸 보면 상대방은 꽤나 참을성 있는 사람이었던 게 분명하다. 지금 와서 돌이켜봐도 헛웃음이 나올 법한 엉뚱한 발언이었지만 당시 나는 필사적이었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중요함’의 기준을 설파하는 어른들에게, 나도 나만의 중요함이 있다는 걸 알려주자. 절대 터지지 않는 튼튼한 비눗방울, 이 얼마나 멋진 것인가! 보험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게 강력 비눗방울 보다 중요할 리는 없다. 그리 확신한 나는 수화기 너머의 아주머니도 분명 비눗방울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될 것이라고 열심히 설명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주머니는 흥미가 없다는 듯 몇 번 “네에, 네에”하고 건성으로 대답하더니 내가 무어라 더 말할 새도 없이 전화를 뚝 끊었다.
뚜- 뚜- 공허하게 울리는 통화 종료음을 앞에 두고 나는 조용히 화장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화장실에서 혼자 비눗방울을 불면서 스스로 감탄했다.
어른들은 후 불면 날아가버리는 종이 쪼가리에 목숨을 걸지만, 나는 그것보다는 터지지 않는 비눗방울이 더 중요하다. 무지갯빛 물결이 넘실거리는, 얇디얇은 막 하나. 세상을 있는 그대로 비추지는 못해도 올록볼록 신기한 시점으로 왜곡시켜 주는 동그란 거울.
돌이켜 보면, 그때 내 눈에는 비눗방울이 묻어 있었던 모양이다. 세상이 일그러져 보이고, 중요한 것이 뒤바뀌어서 보이는 요상한 비눗방울이 눈앞을 둥둥 떠다녔던 것이다. 그리고 비눗방울이 벗겨진 지금은 어른들의 말이 이해가 된다. 그림책에 그려진 모양이 무엇인지, 개미들의 행렬이 어떤 방향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제는 그런 것들을 봐도 머릿속에는 요만큼도 들어오지 않는 대신, 통장 잔고나 학교 성적, 텅 빈 이력서 경력란은 굳이 알고 싶지 않아도 머릿속에 쏙쏙 들어온다.
문득, 나도 남들과 같은 중요함의 기준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이 실감된다. 어릴 적에는 서로 같은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면 모두가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었는데, 그건 눈에 비눗방울을 끼고 살았을 적의 망상에 불과했다. 무엇보다도 나 스스로가 변했다. 이제는 그림책에서 독특한 모양을 발견한 것에 남몰래 기쁨을 느끼지 않고, 보도블록 중에서 혼자서 색이 다른 부분을 발견해도 무심하게 지나칠 수 있는 어른이 되었으니까.
누군가와 같은 기준을 가지고 중요함의 가치를 공유하는 것이 이렇게 씁쓸한 일인 줄 알았다면 애써 바뀌려고 아등바등거리지 않았을 텐데. 그 옛날 어른들과 똑같은 눈높이를 가지게 된 나 자신이 조금 슬프게 느껴진다.
언젠가 다시 눈에 비눗방울을 묻히고 싶다. 누가 입김을 불든 말든 터지지 않는, 그런 튼튼한 비눗방울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