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사람으로 태어난 걸까
나는 어릴 적부터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으로 태어난 게 싫었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무익한 다툼으로 스스로를, 그리고 주변을 상처입히기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뉴스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식을 들으면, 더더욱 인간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 다른 생명체들을 배려하지 않고, 스스로 삶의 터전을 망가뜨리고, 그러면서 한도 끝도 없이 사리사욕만 채우려 드는 사람들. 나는 그런 뉴스를 들을 때마다 “도대체 왜 지구에 사람이라는 종이 나타난 걸까? 별반 도움도 안 되는데…”라며 툴툴거렸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지렁이에 관한 책을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다. 지렁이는 축축한 땅밑에서 일평생 흙을 먹으며 살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들이 살고 있는 토양을 비옥하게 만든다. 나에게는 그 일생이 너무나도 감동적으로 느껴졌다. 누구 하나 인정해 주는 이가 없음에도, 스스로 가장 낮은 곳을 자처하며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는 모습. 나는 지렁이의 모습을 통해 사람들이 그토록 부르짖는 ‘사랑과 자비’의 가치를 몸소 실천하는 삶을 보았다.
하지만 나는 감탄과 동시에 이런 회의감도 품었다.
‘저 작은 지렁이도 세상을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데 인간은 그 좋은 머리를 가지고 대체 무얼 하고 있는 걸까.’
회의감은 점점 깊어져 갔고, 어느 순간부터 나는 “사람이 아니라 지렁이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걸…”이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사람으로 태어나 무익한 경쟁 속에서 살아가느니,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주변을 아름답게 가꿀 수 있는 지렁이로 태어나는 편이 훨씬 더 좋아 보였으니까.
물론 이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선생님께 “저는 사람보다 지렁이가 되고 싶어요”라고 말했을 때는 쓴 웃음만이 돌아왔고, 중학생이 되어서 부모님께 다시 한 번 “사람이 아니라 지렁이로 태어났으면 좋았을걸…” 이라고 말을 흘렸을 때는 지독한 사춘기가 왔다는 핀잔을 들었다.
그럴수록 나는 더욱 불만을 품었다. 왜 다들 당연하다는 듯이 지렁이 보다 사람으로 사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걸까? 단순히 편하게 살 수 있으니까? 지혜와 지식을 가지고 세상을 자기 것처럼 주무를 수 있으니까? 아니면 인간이 모든 동물들 중에서 가장 우월하다고 생각해서?
하루는 머리속을 떠도는 의문을 참지 못해서 어머니와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었다. 왜 사람들은 스스로를 가장 우월하다고 착각하느냐고, 왜 지렁이의 삶을 우습게 보느냐고 말이다. 그러자 어머니는 왈칵 역정을 내며 이렇게 말했다.
“얘는! 아주 공부하기 싫어서 별의별 소리를 다 하네! 사람은 하나님이 직접 신의 모습을 본 뜬 피조물이라고 창세기에 적혀 있잖아! 그러니까 당연히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그 삶을 누려야지, 왜 그런 미물이 되려고 해?”
나는 말문이 턱 막혔다. 물론 할 말이야 많았다. “그렇게 치자면 지렁이도 하나님이 만든 소중한 피조물인데, 왜 지렁이를 부러워하면 안 되는 건데?!” 하고 목소리를 냅다 높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왜냐하면 어떤 말을 하더라도 그것들이 전부 ‘공부하기 싫은 사춘기 아이의 헛소리’로 치부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렁이가 되고 싶다는 소망이 엉뚱하다는 건 인정한다. 인간도 인간만의 방법으로 세상을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나갈 수 있으니까. 그런 가능성을 모조리 무시한 채 무작정 “사람으로 태어나느니 지렁이로 태어나는 편이 나았어!”라고 억지를 부리니, 어머니 입장에서는 기가 찼을 것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지금, 나는 다시금 그 주제에 대해 성찰해 본다. 어린 시절의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왜 그렇게나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한탄했을까.
돌이켜 보면 그때 당시 나는 실존적인 고민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고민이 인간에 대한 회의감으로 표출된 것이었다. 나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전 생애를 바쳐서 이루어야 할 어떤 삶의 목표도 없이 이 세상에 뿅 하고 우연히 태어난 존재에 불과하다. 따라서 치열한 삶의 투쟁과 고민을 거듭하면서 스스로의 삶의 목적, 태어난 이유를 찾아가야 한다. 그것이 인간이 짊어진 숙명이다.
말 그대로 맨 몸으로 이 세계에 내던져진 나는 정처 없이 방황하면서 몸뚱이를 가려줄 옷을 찾으려 돌아다녔다. 하지만 기껏해야 20년도 채 되지 않은 짧은 시간 속에서 마땅한 옷을 찾을 리가 없다. 거기다 사고방식도 주변 사람들과는 너무 괴리된 탓인지 누군가에게 공감을 얻을 수도 없었다. 나는 마땅히 기대거나 마음을 털어 놓을 쉼터조차 없이 혼자서만 잔뜩 고민을 끌어 안은 채 이리저리 떠도는 신세였다.
결국 나는 사람 그 자체를 미워하고 싫어한 게 아니라, 쉼 없이 떠돌아다니는 내 신세를 한탄한 것이다. 아무런 목적이나 존재 이유도 알지 못한 채 그저 물살에 휩쓸려 살아가는 삶에, 그리고 그런 삶을 살아야 하는 인간으로 태어난 것에 한탄했다. 무엇보다도 비관적인 생각만 토해내면서 주변을 어지럽히는 ‘나’라는 존재가 너무 싫었다.
그 점을 생각해보면 당시 내가 가졌던 고민은 일종의 자기혐오, 실존적인 고민에서 나타난 것이었다. 그때는 자신이 왜 그런 고민을 가졌는지 깊이 있게 돌아보는 일 없이, 막연히 사람이 싫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것이 단순한 인간 혐오가 아니라, 끊임없이 투쟁하며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일종의 공포와 무력감이었음을 안다.
어른이 되고 대학을 졸업한 지금도 때때로 자문해본다. 인간이 나은지, 아니면 지렁이가 나은지. 그럴 때면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이렇게 대답하기로 했다.
지렁이든 인간이든 각자의 위치에서 일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각자에게 주어진 능력과 재능을 세상을 위해 사용하는 것. 지렁이는 그걸 숨 쉬듯 쉽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부러움의 대상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지금 당장 지렁이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나는 내 위치에서 주변에 선한 영향을 끼치도록 나아가면 된다. 지렁이가 흙을 퍼먹어서 대지를 비옥하게 만들듯, 나 역시 지금껏 먹은 지식을 양분 삼아 사람들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위안과 희망을 주고 싶다.
나는 다른 이들에게, 그리고 내가 살아가는 환경에 양분을 줄 수 있을까? 일상 속에서 누군가와 만날 때마다, 혹은 글을 통해 누군가와 이어질 때마다 그런 고민이 문득 떠오른다. 예전에는 그런 고민조차 괴로워서 ‘역시 인간으로 사는 건 너무 힘들어’라고 투덜거렸지만, 이제는 이 고민이 지닌 가치를 알게 되었다. 이 고민은 내가 살아가면서 당연히 마주해야 할 문제라는 것을, 지렁이가 아닌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안고 가야 할 의문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 나는 가장 높은 꿈을 꾸고 싶다. 살아 숨 쉬는 동안 자신과 타인을 사랑하고 주변을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는 꿈. 지렁이가 심어준 그 꿈을 앞으로도 좇을 수 있다면, 적어도 내 망상이 헛소리로 끝나지는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