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 ~4

'나'는 어떤 존재인가? 나는 '신'인가?

by 철인


1. 나= 생각하는 자 Res cogitans



저번 글은 '내'가 일반적인 의미의 인간이 아니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 그렇다면 인간도 아니요, 신도 아니라면 나는 대체 어떤 존재란 말인가?


먼저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데카르트가 말하는 '일반적인 의미의 인간'이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보통 "인간이 뭐예요?"라고 물으면 다음과 같은 답변이 돌아올 것이다.


이족보행을 하는 이성적인 동물

호모 사피엔스

독자적인 언어로 의사소통 하는 존재

동물의 한 종류


그런데 이러한 답변은 모두들 인간을 유한한 존재로 전제하고 있다. 즉 인간은 세계라는 거대한 시공간의 일부라고 전제하는 것이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적어도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지구라는 세계 속에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살아가니까.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세계와 별개로 존재하는 동시에 세계에 속한 자이며, 신체적으로 제약된 세계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개개인이 죽어도 세계와 다른 존재자들은 그대로 남아 있다. 내가 지금 죽는다고 해서 온 세계가 끝장나는 일은 없듯이, 세계는 우리를 둘러싼 거대한 무대이며 우리는 그 위를 오르내리는 배역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일반적 인식과 달리, 데카르트가 주장하는 'cogito로서의 나'는 세계 전체의 표현과 겹쳐져 있다. 쉽게 말해서 세계 자체가 '생각하는 나'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따라서 나는 세계의 일부분이 아니라 그것들을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존재이자, 내가 경험하고 있는 세계의 근거이다. 그렇기에 일반적인 인간과 달리 대상화되는 다른 존재자들(타인, 자연, 동물, 건축물 등)과 나란히 동격에 위치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을 cogito 즉 생각하고 있는 존재인 셈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아래의 그림을 살펴보자.


왼쪽: 일반적인 의미의 사람. 세계의 일부분으로서 다른 존재자들과 동격임 / 오른쪽: 데카르트가 생각하는 '생각하는 나'. 세계를 생각하는 주체이자 세계가 생겨난 근거


그럼 이러한 나를 대체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육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살아있다고도 할 수 없는 존재. 그렇지만 세계를 생각하는 주체이자 세계의 근거로서 확고부동하게 존재하는 '나'.


이런 나의 존재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생각하는 자로서 존재하는 자(res cogitans; a thinking thing)>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이것이야 말로 나의 본질이다. 나는 사고하는 자, <언제나> 생각하는 자, <본질적으로> 생각하는 자라고 밖에 부를 수 없다. 어쩌다 한 번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생각하고 있고, 그 생각의 순간마다 존재가 성립하는 것이 바로 나인 것이다.




2. 나= 실체 Substania


그렇기에 나는 다른 존재자들을 대상화하는 존재로서 다른 어떤 존재자들과도 관계를 맺지 않고, 동격에 위치하지 않는 독보적인 지위를 가지게 된다. 다른 존재자들은 나의 대상 세계(對象世界)에 포함되는 것들이므로 나와 <어떤 인과관계도 가질 수 없는 것>들이다. 다만 내가 그것들을 생각했기에 비로소 존재하는 것뿐이지, 그것들이 나의 존재 근거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나란 존재는 '이유는 모르겠으나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만물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이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res cogitans로서 스스로 완결된 존재이며, 다른 어떤 것으로도 인과관계를 갖지 않는 절대적인 존재자이다. 이는 언뜻 보면 굉장히 거만한 말로 들리지만 실은 더 깊은 뜻이 숨겨져 있다.


왜냐하면 절대적인 존재자로서의 '나'야말로 데카르트가 추구한 확고부동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타자와 인과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생각해 볼 때 인간은 다른 존재자 없이 독자적으로 살아갈 수 없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말이다. 사람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 애초에 내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부모님이 필요하고, 태어난 이후로도 의식주와 적절한 환경, 이를 제공해 주는 보호자 등등 여러 종류의 타자(他者)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것들은 내가 신체를 가졌을 때만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잊지 말자. 지금 우리는 데카르트의 사고 실험 안에 있다. 여기서는 내 몸이 실제로 있는지 없는지, 아니 애당초 내가 생물인지 아닌지조차 불분명한 상태이다. 따라서 생명 유지를 위해 필요했던 다른 존재자들도 지금으로서는 전혀 필요 없다.


그리고 데카르트는 이러한 일련의 실험을 통해서 <가장 확실한 절대불변의 사실>을 확정했다. 바로 '생각하는 존재로서 존재하는 나'다. 나는 어떤 근거도 필요로 하지 않고, 스스로 세계 전체의 근거로서 존재할 뿐이다. 말하자면 외부의 어떤 요소로도 흔들리지 않는 확실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때 주의할 것은 '생각하는 나'가 확실한 존재라고 해서, 내 생각에서 비롯된 '다른 존재자'들까지 확실한 존재인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타자들은 어디까지나 나의 관념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나의 대상 세계 속에서 '존재한다고 생각되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그것들은 나의 존재를 확실하게 유지해 줄 근거가 될 수 없고, 결국 나는 타자를 필요로 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독립자존의 존재자를 철학에서는 실체(substania)라고 부른다.


aaaaa.png 철학사에서 말하는 실체. 왼쪽 위에서 시계방향으로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스피노자(출처: 스티븐 내들러 저, <철학의 이단자들> )



즉 데카르트의 철학에서 말하는 '생각하는 나' 역시 일종의 실체(substania)인 셈이다. 동시에 나는 세계의 유일한 근거이자, "내가 사라지면 세계도 사라진다"라고 당당하게 선언할 수 있는 절대적인 존재이다.




3. 진리의 문제, 신의 문제: 신은 실재하는가?


그렇다면 데카르트는 왜 굳이 res cogitans 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이면서까지 절대적인 존재자로서의 '나'를 규정하는 것일까? 이것은 진리의 문제, 신神의 문제와 결부된다.


데카르트는 <제3성찰>에서, 신의 존재 때문에 진리라는 개념 자체에 위기를 느꼈다는 감각을 토로한다.


나는, 만약 신이 그럴 마음만 먹으면, 내가 정신의 눈으로 더없이 확증적으로 직관한다고 생각하는 것에 있어서도 나를 착각시키는 것은, 신에게 있어서 손쉬운 일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내가 지극히 명료하게 파악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를 바라보면, 그때마다 그것들을 전적으로 확신해 버리고, 나도 모르게 다음과 같이 외치게 된다.
속일 수 있다면 누구라도 날 속여 봐라. 하지만, 내가 스스로를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는, 결코 나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할 수는 없다. 또는, 나는 존재한다는 것이 실제로 참인 이상, 나는 결단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참이라고 할 수는 없다. 혹은 또, 2 더하기 3을 5보다 많다고 하거나 적다고 하는 등의 행동은 결코 불가능하다.
(제3성찰)



<하지만 동시에>를 기점으로 데카르트의 생각에 극명한 차이가 드러난다. 이전까지는 전지전능한 신이라면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도 나를 속일 수 있다는 불안이 드러난다. 하지만 후반부에는 갑자기 태도를 바꿔서, 진리가 사라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확신한다.


도대체 신이 철학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길래, 데카르트는 이다지도 신의 존재에 휘둘리는 걸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신과 진리의 상관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위의 인용문에서 드러나듯이 [2+3=5] 같은 확증적인 것도 단지 '이렇게 생각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전지전능한 신은 이런 것으로도 얼마든지 우리를 착각하게 할 수 있으니까. 실제로 우리는 방법적 회의를 통해 2 더하기 3이 4가 아니라 5라는 확신은 어디에도 없음을 확인했다.


그런데 여기서 '이렇게 생각된다'는 표현에 주목해 보자. 이는 인식의 주체인 나에게는 적어도 확증적이고 직관적으로 느껴진다는 것, 즉 나에게 있어서는 그것들이 진리의 기준이 될 만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나만의' 진리 기준으로는 불확실하다. 따라서 "학문의 확실성을 성립하자"는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도 다음과 같은 신의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해야 된다.


이 문제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다.


"신은 실제로 존재하나? 만약 존재한다면 이는 선한 신인가, 아니면 기만자인가?"


여기에 대답하기 앞서, 위에서 언급한 2+3=5를 다시금 예로 들어보자.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이와 같은 이성적, 필연적 진리는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신이 마음먹은 대로 언제든지 바뀔 수 있으니까. 즉 이 신이 선신善神이라는 전제 하에서, 더욱이 그 신이 "2+3=5는 필연적 진리다"라고 정했기 때문에 필연적 진리가 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이 필연적 진리로 성립하는 이유는 단지 "신이 그리 원했기 때문이다"라는 것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이러한 영원 진리 창조설, 무에서의 창조(cretio ex mihilo)에 대해서도 근거를 구하려 하고 있다. 아무리 확증적인 필연적 진리라 해도 여기에 신이 개입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확실성이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이유에서, 그는 필연적 진리가 필연적인 이유, 그것이 필연적으로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아 헤맨다.


과연 데카르트는 그 답을 찾았을까? 이에 대한 여정을 떠나기 전에 앞서 소개한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미리 답하고자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신은 존재한다>. 게다가 데카르트가 이러한 사실을 찾아낸 곳은 다름 아닌 독립자존인 '나'의 존재로부터다.




아니, 방금 전까지 나는 다른 어떤 존재자도 필요로 하지 않는 실체라고 실컷 말해놓고서는 갑자기 생뚱맞게 신이 존재한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나를 창조한 신이라도 있다는 것인가? 그렇게 되면 나는 독립자존의 존재가 아니게 되는데?


과연 '실체로서의 나'와 신의 존재는 양립 가능한 것인가? 다음 시간에는 이에 대해서 알아보기 위해, 우리가 어째서 유한한 실체이며, 신의 존재 여부와 진리 문제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상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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