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 ~3

데카르트 씨, 이의 있습니다!

by 철인


1. 데카르트의 '모순'


지난번 글에서는 그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도출한 경로를 살펴보았다. 동시에 이 명제가 치명적인 결함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그것은 바로, 모든 것을 의심한다면서 모순율(어느 명제는 참인 동시에 거짓일 수 없다는 원리) 자체는 의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모순율을 의심하지 않았던 데카르트. 그의 추론은 완벽하지 않았던 것일까?


만일 그가 모순의 개념까지도 의심했다면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 자체로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증명된다"는 결론을 이렇게 쉽게 내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방법적 회의는 완벽하지 않았던 것일까? 데카르트는 대체 무엇을 근거로 '나는 확실히 존재한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




3장에서 인용한 바와 같이 데카르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략) 왜냐하면, 사유하고 있는 것(사유의 주체)이, 사유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 주목하면 그는 모순율을 의심하지 않고 이를 그대로 근거 삼아 나의 존재를 증명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애당초 데카르트가 증명하고자 한 것은 '존재 증명'이 아니라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고의 불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이에 대해 차근차근 알아보자.


먼저, 데카르트가 추론을 한 것인가 아닌가부터 짚고 넘어가자.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추론을 행한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경험'을 얻은 것이다. 만약 그가 추론을 통해 결론을 내린 것이라면, 위의 인용문을 다음과 같이 해체할 수 있다.


전제: 우주에는 모순율이 있다

주장: 사유하고 있는 것이 사유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모순이다

결론: 따라서 모순율에 따르면 사유하고 있는 것이 사유하고 잇는 바로 그 순간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모순이므로, 나는 이 명제를 말하는 그 순간마다 명백히 존재한다.


추론은 '우주에 모순율이 있다'는 전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증명되는 것, '간접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데카르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간접경험 따위가 아니다. 그는 추론하는 이전 단계에서 이미 '사유하고 있는 것이 사유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 단적으로 경험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주장을 받아들이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것도 실은 추론이 아니다. 그는 어느 현실에도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 저 명제와 함께 존재함을 직접 경험했으며, 내가 존재하지 않는 현실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직접 경험한 것이다.


다음 인용문은 이러한 직접성을 표현하고 있다.


"명백히 나는 지금 빛을 보고, 소음을 듣고, 열을 느끼고 있지만, 나는 잠들어 있기 때문에, 이것들은 허위다. 하지만, 보고 있다, 듣고 있다, 뜨겁다고 확실히 생각되고 있다는 것, 이 자체는 허위일 수 없다. (제2성찰)"


내가 '무언가를 보는 것'은 거짓일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무언가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거짓일 수 없다. 데카르트는 '생각되는 것'을 직접 경험하고 있는 것이며, 이것은 거짓일 수가 없다는 하나의 '불가능성'을 직접 경험한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간접적인 추론이나 논증이 끼어들 여지도 없이 '내가 그렇다고 느꼈다'라는 식으로 직접적인 경험만이 존재한다.


따라서 데카르트는 모순율을 전제로 추론을 성립시킨 것이 아니라 단지 "생각되고 있다는 것이 거짓일 수는 없다"는 하나의 불가능성을 직접적으로 경험한 것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2. 나는 걷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다음 인용문을 읽어보자.


"예를 들면 "나는 걷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것은, 내가 걷는다는 의식이 사유라고 한정하지 않으면 추단 할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의 사유에 관해서는 이 추단이 확실한 것이지만, 신체 운동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꿈속에서는 때로는 자신이 걷고 있다고 생각되어도, 실제로는 어떤 신체 운동도 없을 때가 있으니까요. 이리하여 저는 제가 걷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그것으로부터는, 말 그대로 제가 그리 생각하고 있다는 정신의 존재를 추단 할 수 있습니다만, 걷고 있는 신체의 존재를 추단 할 수는 없습니다.(제오답변)"

위 글을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데카르트는 "나는 걷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를 제시하면서, 이것은 꿈일 수도 있기 때문에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만약 이를 성립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지금 걷고 있다는 의식이 사유인 한에서 가능하다. 달리 말하자면 내가 현재 걷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곧 이러한 사유를 하고 있는 내가 존재한다는 뜻이므로, 걷고 있다는 의식이 사유로서 생겨나는 한 "나는 걷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가 성립하는 것이다.


역으로 말하자면 이러한 "~~ 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는 사유에 있어서만 확실히 성립하는 것이지, 신체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확정도 내릴 수 없다. "나는 걷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가 성립한다 해도 거기에서 내가 실체를 갖고 존재한다는 결론이 나오진 않는다는 말이다. 단지 "걷고 있다고 생각된다"고 사유하는 정신의 존재만이 확정될 뿐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단계에서 확실히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나의 '정신' 뿐이지, 신체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것도 단정할 수 없다.


이러한 일련의 고찰에서 알 수 있듯 데카르트의 직접 경험은 꿈의 회의와 연관성이 깊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을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당신이 지금 노트북에 앉아 글을 읽는 게 꿈일 수도 있지만 당신이 '나는 지금 글을 읽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거짓일 수 없다. 실제론 노트북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자리에 누워 쿨쿨 자고 있을지도 모르나, '내가 글을 읽고 있다는 세계'가 나 자신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는 것 자체는 확실하다. 그렇기에 데카르트는 확신을 가지고 말한다.


"cogito, ergo sum!"


나의 sum(존재)은 곧 나의 cogito(의식을 가지고 생각하는 것)이며, 이는 곧 세계 전체의 표현(나타남)과 나 자신의 존재가 대응관계에 있음을 의미한다. 나를 둘러싼 세계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모른다. 어쩌면 모든 것이 환상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가 나에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 자체는 확실하다>.


여기서 세계 전체는 하나의 현상으로서 성립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표현의 확실성이며, 내가 존재한다는 것의 본질이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는 한, 나는 일반적 의미의 인간이 아니라 세계와 함께 드러난 존재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담 세계와 함께 드러난 나는 대체 어떤 존재일까?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자세히 다뤄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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