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2

방법적 회의에서 알아낸 나의 존재

by 철인

1. 세계관 부수기


AD.25517405.1.jpg 불확실한 것들 사이에서 단 하나의 필연적인 확실성을 찾고자 하는 데카르트


데카르트는 필연적인 학문의 기초를 찾기 위한 대장정을 시작하려 하지만, 사실 이는 결코 쉽지 않다. 애당초 '유일한 진리로 구성된 확실하고 필연적인, 학문의 기초이자 원점'이라는 말만 들어도 도대체 무엇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찾아야 될지 엄두조차 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니까. 그렇기에 데카르트는 이 문제에 최대한 쉽게 접근하고자 한다.


맨 먼저 데카르트는 '우리가 원래 가지고 있던 세계관을 모조리 부술 것'을 제안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백지상태로 되돌려야 숨겨져 있던 원점이 훤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을 일일이 하나하나 거짓인지 아닌지 증명 또는 조사할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우리가 여기서 버려야 할 것은 딱 두 종류다.


하나는 명백하게 거짓인 것이고, 또 하나는 의심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2-2=4'라든지, '2024년 현재 한국 대통령은 이승만이다'와 같이 누가 봐도 거짓인 것이 그 예시다.


그리고 후자의 사례로는, 지금 우리가 가진 거의 대부분의 지식이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앞에서 말한 '개연성이 존재하는 영역'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보편적으로 '까마귀는 까맣다'는 지식을 갖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아직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지 세상 어딘가에는 흰 까마귀나 분홍색 까마귀도 있을 수 있다. 세상의 모든 까마귀는 예외 없이 까만색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거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 두 종류를 머릿속에서 제거하자고 주장한 데카르트는, 다음과 같이 깔끔하게 결론을 내린다.


"그러니까 이런 불확실한 것들을 모조리 제외하고 남은 것들만 탐구하면 돼! 참 쉽지?"


말이야 쉽다, 이 아저씨야.


이 말을 풀어보면 우리가 탐구해야 될 영역은 필연적인 영역, 오직 단 하나의 진리만이 있는 확실한 영역이라는 말이 된다. 앞에서 말한 수학이 그 대표적인 예시다. 그리고 이런 확실한 영역을 찾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우리의 지식을 뒤엎어 놓을 필요가 있는데, 이때 등장하는 방법이 바로 '방법적 회의론'이다.


여기서 '방법'이란 '맛있게 요리하는 방법'처럼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나 방식을 뜻하므로, 이 말을 풀어보면 '확실한 영역을 찾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회의론'이라는 뜻이 된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회의론을 이용해 "누가 누가 학문적인 기초가 될 수 있을까요?"라는, 일종의 학문적 기초의 후보를 선정하게 된다.




2. 꿈의 회의와 악마의 가설


먼저 첫 번째 회의론은 Dream argument, 일명 '꿈의 회의'다. 쉽게 말해서 세상만사를 "이건 혹시 꿈이 아닐까?"라고 의심해 보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꿈을 꾸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어떤 개별적인 것, 말하자면, 우리가 눈을 뜨는 것, 머리를 움직이는 것, 손을 뻗는 것들이 진짜가 아니라고 생각해 보자. 또, 우리가 손을 가지고 있다는 것, 신체의 모든 부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조차도, 아마 진짜가 아니라 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보자. (<제1성찰>)"


2018011601336_0.jpg 우리가 지금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꿈이 아니라는 보장이 어디에 있는가?


만약 당신이 지금 책상 앞에 앉아서 컴퓨터나 혹은 스마트폰으로 이 글을 읽고 있다고 해보자. 당신은 그것을 의심할 여지없이 현실이라고 여기겠지만, 실은 그것이 아주 정교한 꿈이 아니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잠에서 깨고 난 뒤에도 한동안 여운이 남을 정도로 현실적인 꿈을 꾼 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면 우리의 오감이나 신체마저도 실재성이 의심되는 것, 말하자면 불확실한 존재가 되는 셈이다. 데카르트는 이러한 꿈의 회의를 사용하여 일차적으로 '의심할 만한 것, 필연적이지 않은 것들'을 걸러낸다. 그리고 이에 해당하는 것들은 절대적인 학문의 기초가 될 수 없으므로 자연스레 후보에서 탈락한다.




그리고 두 번째 회의론은 Argument from a deceptive God, 일명 '악마의 가설'인데 직역하자면 '속이는 신, 사악한 신의 회의'이다. 이것 또한 꿈의 회의와 비슷하지만 둘의 차이점은 속이는 주체가 꿈이 아니라 '신'이라는 점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신이 만든 정교한 환상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다. 여기서 말하는 신은 종교에서 믿는 것과 같이 인간을 아끼는 선한 존재가 아니라 우리의 모든 관념과 인식을 일그러트리고 속이려 드는, 악하지만 전지전능한 신을 말한다. 이에 대해 데카르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즉, 전능한 신이 있어서, 그 신에 의해 나는 지금의 형태로 존재하도록 만들어졌다,라는 생각이다. 그런데 이 신이라는 것은 땅과 하늘도, 넓이를 가지고 있는 것도, 형태도, 크기도, 장소도 실제로는 전혀 존재하지 않음에도, 나에게 이것들이 전부 지금 보이는 대로 존재하고 있다고 착각하게끔 했을지도 모른다. 더욱이 (...) 2와 3을 더할 때마다, 혹은 사각형의 변의 개수를 헤아릴 때마다, (...) 이 신은 내가 잘못 판단하도록 했을지도 모른다. (<제1성찰>)"


"... 따라서, 진리의 원천이 되는 선한 신이 아니라, 어떤 악한 영, 게다가 최고의 힘과 교지(狡知; 교활한 지혜)를 갖춘 영이, 온갖 노력을 기울여서 날 속이려고 하고 있다고 상정해 보자. 하늘, 땅, 공기, 색, 형태, 소리, 그 외에 외부의 모든 것은 꿈의 속임수에 지나지 않으며, 나 자신에 대해서도, 손도 눈도, 살갗도, 피도, 그 어떤 감각도 가지고 있지 않고, 이것들을 전부 착각하며 갖추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제1성찰>)"


위에서 언급한 꿈의 회의에서는 내가 걷는 것, 손을 움직이는 것 등 개별적인 사실에 관한 회의인 반면, 악마의 가설은 이성적 추론 자체를 흔든다. 인용문에서 제기된 2+3 이 바로 이성적 추론의 전형이다.


앞서 말했듯 데카르트는 수학이야말로 가장 확실하고 절대적이라고 평가했고, 실제로 2+3의 값은 '5' 이외에 다른 답이 있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이런 확실성의 화신과도 같은 수학에도 "사악하고 전지전능한 존재가, 우리로 하여금 2+3의 값은 5 이외에는 있을 수가 없다고 오해하도록 속였을 수도 있다"는 식의 회의가 가능한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그는 두 차례에 걸쳐 진리의 종류를 거른다. 첫 번째 꿈의 회의에서는 사실의 진리(truth of fact)를 거르는데, 우연적 진리라고도 불리는 이것은 라이프니츠의 <진리의 분류>에 따르면 '필연적이지 않으므로 그 반대 경우도 가능한 진리, 혹은 부정하더라도 논리적 모순이 발생하지 않는 진리'를 뜻한다. 예컨대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었다'라는 역사적 사실에 있어서도 "실은 또 다른 사료가 발견되어서 이를 살펴보니 한글을 만든 건 다른 왕이었다!"는 개연성이 얼마든지 성립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회의론인 악신의 가설에서는 이성의 진리(truth of reason)가 걸러진다. 이것은 부정할 시 논리적 모순에 빠지는 종류의 진리인데,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이다', '사각형의 변의 개수는 4개이다'와 같은 대부분의 수학적 진리가 이에 해당한다. 이러한 진리를 부정할 경우 '삼각형이지만 삼각형이 아닌 것, ' 또는 '사각형이면서 사각형이 아닌 것' 등 모순이 발생하게 되어 일견 확고부동의 진리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것조차도 악신의 속임수에 의한 착각이라고 의심할 수 있으므로 학문의 근간, 즉 확실성의 후보에서 탈락하는 것이다.




3. 유일한 확실성은 다름 아닌 나 자신


이런 회의, 저런 회의로 이것저것 온갖 지식을 다 걸러내다 보니, 사실 이쯤 되면 데카르트가 말한 확실성이라는 것이 당초에 존재하기는 하나 싶은 의심도 든다. 하지만 그런 의심 때문에 우리가 등을 돌릴 즈음 데카르트는 아주 단순 명료한 결론을 내린다. 그가 촘촘하게 짜놓은 방법적 회의라는 그물망을 피하고 온전히 남겨진 유일한 확실성,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 결론을 <제2성찰>에서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나는 '세계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하늘도 없고, 땅도 없고, 정신도 신체도 없다'고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렇다면, '나 또한 없다'고 설득한 것은 아닐까? 아니다. 내가 스스로를 설득했다면, 나는 확실하게 존재하고 있었던 셈이 된다. 지금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지극히 유능하고, 지극히 교활한 사기꾼이 있어서, 온갖 책략을 짜내서, 언제나 날 속이고 있다. 그렇다 해도 그가 날 속이고 있다면, 의심할 여지없이, 나 또한 존재한다는 것이다. 속이고 싶다면, 어디 있는 힘껏 속여도 좋다! 하지만, 내가 스스로를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는, 결코 그는 나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모든 것을 십분 숙고한 결과, 최종적으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있다, 나는 존재한다 Ego sum, ego existo>라는 명제는, 내가 이것을 말하고 표현할 때마다, 혹은 이를 정신으로 파악할 때마다 필연적으로 참이라고 말이다. (<제2성찰>)"



여태껏 우리는 두 가지 회의론을 통해 여러 지식을 거른 결과, 어느 것 하나 확실한 것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단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신할 수 있다. '지금까지 방법적 회의를 해온 것도 나, 그리고 이를 통해 설득하려 한 대상도, 주체도 나'라는 사실이다. 즉, 지금껏 회의를 수행해 온 '나'는 확실하게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만큼은 자신 있게 단언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 ego sum, ego existo'라는 명제는 필연적으로 참이 된다.




하지만 여기에는 조건이 붙어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 명제는 '내가 이것을 말로 표현할 때마다, 혹은 정신으로 파악(생각)할 때마다' 참이라는 조건이 붙어있다. 혹시라도 입이 없을 수도 있으니(?) 정신으로 파악할 때도 그때마다 명제가 성립한다고 친절하게 덧붙여준 데카르트에게 감사한다. 고맙긴 한데, 그래서 이 조건이 의미하는 바는 대체 무엇인가?


예를 들어 내가 지금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한 뒤, 이를 녹음했다고 치자. 그리고 그 음성 파일을 내가 죽은 뒤에도 튼다면, 그때도 내가 존재한다는 말이 성립하는 것일까? 만약 이게 참이라면, '나는 존재한다_mp3'라는 파일이 있는 한 나는 불멸의 존재일 것이다. 언제 어디서든 그걸 틀기만 하면, 나는 그 순간 그 장소에 존재하는 셈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불과하다. 내가 정말 살아 숨 쉬는 상태에서, 그 명제를 자신의 힘으로 생각해서 말해야만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가 참이 된다. 즉 데카르트가 이 명제에 조건을 붙인 것은 위와 같은 어설픈 상상을 예방하기 위함이요, 또한 이 명제가 순간순간에만 참이라는 사실을 명시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는 그것을 선언하는 바로 그 순간을 벗어나면 더 이상 성립하지 않는 명제, 의미를 잃은 명제가 된다.


그리고 이 결론에서 그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도출되는 것이다.




아니, 뜬금없이 잘 이야기하다가 왜 "나는 생각한다"로 빠지는 건가. 아까는 그저 "나는 있다, 존재한다"라는 말 밖에 없었는데! 여기서 '생각한다'는 부분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어떤 방법으로 의심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그 모든 것을 거부하고, 그것을 거짓이라고 한다면, 확실히 신도 없고 하늘도 물체도 없다고 쉽게 상정할 수 있을 것이고, 또, 우리 자신이 손도 발도 없고, 끝에 가서는 신체조차도 가지지 않는다고 쉽게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사유하고 있는 우리들이 '무無'라고 상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사유하고 있는 것(사유의 주체)이, 사유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ego cogito, ergo sum>이라는 인식은, 모든 인식들 중에서, 올바른 순서대로 철학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맞닥뜨리게 되는, 최초로 가장 확실한 인식이다" (<철학의 원리 Principia philosophiae> 제1부 7장)


앞서 말했듯 "나는 있다,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는 이것을 생각하거나 말로 표현하는 그 순간을 벗어나면 의미를 잃는다. 반대로 말하면, 이것은 우리가 사유하는 그 순간만큼은 확실히 존재하는 명제라는 뜻이 된다. 따라서 사고하는 바로 그 순간에 사고의 주체인 '나'가 존재하지 않는 건 모순되므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결론이 도출되는 것이다.


생각하는 자는 생각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는 존재할 수밖에 없다. 만일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버리면 이는 자기모순을 범하는 꼴이 된다. 왜냐하면 이 명제를 표명하고 있는 주체가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명제가 성립하는 것 자체로 내 존재가 증명되는 것이다.


이를 알기 쉽게 유령에 비유해 보자.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등 뒤에 유령이 슬그머니 나타나서 "나는 죽어있다~"라고 말한다면 거기까지는 OK다. 당연히 유령이니까 살아있는 건 아니겠지, 하고 받아칠 수 있으니까. 그렇지만 유령이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확실히 거짓말이다. 이미 나에게 말을 걸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시점에서 유령은 명백히 존재하고 있으며, 이를 부정한다는 것은 곧 "말은 하고 있지만 말하는 사람은 없어요!"라는 되지도 않는 모순을 저지르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가 있다고 하면, 이는 명제 자신이 성립한다는 사실과 반대되므로 우리는 모순을 범하지 않기 위해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로써 데카르트는 가장 확실하고 절대적인 근간을 확립했다. '내'가 존재하는 한, 인간은 각자의 내면에 확실성을 가진 셈이며 그렇기에 그 위에 지식을 쌓아 올릴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일견 그럴 듯 해 보이는 그의 주장에도 허점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모순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가장 확실한 학문인 수학조차도 악신의 가설을 써서 걸러냈건만, 어째서 '모순'이라는 개념은 그리 쉽게 인정했던 것일까? 다음 시간에는 이 점에 대해서 다루면서 '존재하는 나'가 어떤 존재자인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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