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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인 Sep 27. 2024

탐구하는 철학의 시작, 고대 그리스

탈레스, 소크라테스, 플라톤으로 이어지는 고대 철학의 계보

1. 고대 철학의 시작, 탈레스


 자, 어제까지 철학의 정의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철학사를 따라가며 철학이 어떻게 발생했고, 또 철학의 주류 사조가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살펴보자. 이를 위한 첫 단계로, 고대 그리스로 잠깐 떠나보자.


 모두가 잘 알다시피, 고대 그리스는 철학의 발생지로 불린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우리가 이름을 알고 있는 쟁쟁한 철학자들도 대부분 고대 그리스 출신이며, 이후 중세에서 근대로 이어질 때까지 고대 그리스 철학은 철학뿐만 아니라 학문을 배우고자 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기초 중의 기초나 다름없었다. 그만큼 고대 그리스가 학문 체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탐구를 탐구하는 학문, 당연한 것을 되묻는 학문인 철학은 과연 고대 그리스에서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먼저 철학의 선조라고 불리는 이를 소개하겠다. 바로 '탈레스'이다.


 탈레스라는 이름은 생소할 지도 모르겠지만, 아마 그의 명언을 들으면 다들 "아~"하고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


고대 철학의 선조 탈레스. 그는 "만물은 물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생명'에 착목하여 우주의 원리와 근원을 밝혀내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는 생물이 살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조건, 가장 근원적인 조건인 물이야말로 만물의 근원이라고 결론지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만물이 물에서 태어난다는 그의 주장은 비과학적이고, 옛날 사람답게 사고력의 한계가 명확한 주장이라고 혹평할 수도 있겠으나 철학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굉장히 의미 있는 고찰이다. 그도 그럴 듯이, 탈레스는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고찰하고, 존재와 생명에 대해 그 근본을 진지하게 탐구하고자 시도했던 최초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지난번에 말했듯이, 철학은 우리가 의문시하지 않았던 지극히 당연한 것에 구태여 의문을 제기하고,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자 하는 학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탈레스는 지금까지 당연시되었던 생명과 존재에 대해 "생명은 어떻게 생겨나는 걸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무엇으로 만들어졌을까?"라는 질문을 던진 것이고, 그래서 아직까지도 그를 철학의 시조라고 부르는 것이다.




2. 소크라테스, 반성하는 삶을 살다 간 철학자


 다음으로 되묻기의 철학을 계승한 사람은 그 이름도 유명한 소크라테스이다. 아쉽게도 소크라테스는 저서를 단 한 권도 남기지 않고 자신의 모든 사상을 말로 가르쳤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제자들을 통해서 간접적으로나마 그가 어떤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을 뿐이다.


 그의 제자 중 대표 격인 플라톤은 대부분의 저서에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등장시킬 정도로 굉장한 충성심(?)을 자랑하는데, 거기서 등장하는 소크라테스의 면모를 살펴보면 그는 무엇보다도 철학적인 삶을 중시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느 정도냐 하면, "반성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명>中)"라고 단언할 정도로 탐구심이 넘치는 인물이었다.


반성 없는 삶, 시험받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소크라테스는 평생 이 신념을 지켰다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철학적인 삶을 고수한 것은 아니었다. 소크라테스가 변하게 된 계기는 다름 아닌 '신탁'이다. 어느 날 소크라테스의 친구인 카이레폰이 그리스의 신전 중에서 가장 유명한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에 찾아가 여사제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소크라테스보다 지혜로운 자가 세상에 있습니까?" 그러자 여사제는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이 세상에서 소크라테스보다 지혜로운 자는 없다!"


 소크라테스는 카이레폰에게서 이 말을 듣고 심히 당황했다. 세상은 얼마나 넓고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은데, 그중에서 자신이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니? 또, 만약 그걸 덜컥 믿어버리면 자신은 얼마나 교만한 사람이 되겠는가? 하지만 신의 말을 그대로 거짓말로 치부하는 것도 불경하기 짝이 없는 짓이다. 결국 깊은 고민에 빠진 소크라테스는 이런 결론을 내린다.


 "지혜롭다는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과 대화하면, 이 신탁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 만일 그들에게 하나라도 배울 점이 있다면 이 신탁은 틀린 게 되는 거지!"


 아무래도 토론과 말장난을 좋아하는 기질은 이때부터 있었던 것 같다. 아무튼 소크라테스는 그날 부로 지혜자들을 한 명 한 명 찾아가서 여러 주제로 그들과 의견을 나눈다. 그렇게 내로라하는 지혜자들을 만난 결과, 소크라테스는 "아, 내가 진짜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 맞구나!"라고 확신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혜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자신만만하게 도전하며 내가 그 답을 알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실은 스스로가 답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을 뿐, 아무런 답도 결론도 내릴 수 없었다. 즉 그들은 스스로의 무지無知를 자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상은 지혜자가 아니라 오히려 무지자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반해 소크라테스는 자기 자신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무지한 사람'이라고 표현하며 언제나 묻고 배우고자 하는 학생의 태도를 취했다. 그는 자신이 모르는 것을 있는 그대로 모른다고 생각하지, 그것을 구태여 포장하려 들지 않는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즉 자신이 모르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다는 점에서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인 셈이다.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그리도 철학하는 삶에 집착했던 이유가 여기서 밝혀진다. 바로 사람들에게 무지의 자각을 갖게 하기 위해서이다. 평소 깊이 생각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던 주제들을 가지고 "이 부분을 잘 모르겠다, 왜 모르는 걸까, 어떤 식으로 모르는 걸까"에 대해 심도 있게 고민해 보는 것, 이것이야말로 철학하는 것이며 무지의 자각을 갖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소크라테스가 대체 무엇을 질문했길래 지혜자들이 그리도 쩔쩔맸던 것일까? 그것은 바로 자신의 존재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다. 사랑, 생명, 감정, 웃음 등의 주제는 우리 삶에 있어서 너무나도 익숙한 것들이기에, 자신이 그것을 잘 모른다는 사실조차 깨닫기 어렵다. 만약 소크라테스가 정말로 난해한 수학문제나 생소한 건축물의 구조 따위를 물어봤다면 그들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잘 모르겠는데?"라고 순순히 인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애용하는 주제들은 대개 너무나도 일상적이고 당연한 것이어서 그들이 미처 스스로의 무지를 자각하기도 전에 자기 나름의 결론을 내리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받으면 "이건 생각할 필요도 없는 거지, 당연한 거야!"라는 식의 태도, 즉 독사(doxa; 근거 없는 주관, 억측)에 빠진다. 그렇기에 소크라테스는 집요하게 질문을 던지며 듣는 이로 하여금 이것들이 실은 전혀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 잘 모르는 분야에까지 상대를 끌어들여 탐구를 이어나가게 한다. 이것이 바로 소크라테스가 전 생애에 걸쳐 실천했던 철학이다. 그리고 이러한 철학이 함께하는 삶이야말로 선한 삶이다.




3. 탐구 그 자체를 탐구한 철학자,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대표적인 제자인 플라톤. 그는 탐구 그 자체를 탐구했다


 소크라테스는 탐구하는 자세를 강조했다면, 그의 계승자인 플라톤은 탐구 그 자체를 탐구했다. 그의 철학은 한 마디로 '탐구는 가능한가?'라는 물음으로 축약할 수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메논과 소크라테스의 대화를 살펴보자.



 

메논: 소크라테스, 자네는 전혀 모르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탐구할 셈인가? 만약 우리가 모르는 것을 탐구하려고 해도, 애당초 그것을 전혀 모른다면 어떻게 알고 싶은 분야와 목표를 정할 수 있겠나? 그리고 설령 알고자 하는 분야와 목표를 알아냈다 하더라도, 그것이 내가 원하던 지식임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소크라테스: 즉 메논, 자네는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게로군. 사람은 자신이 아는 것도 탐구할 수 없으며, 모르는 것은 더더욱 탐구할 수 없다고 말이야. 그도 그럴 게, 처음부터 알고 있는 것이라면 탐구할 필요가 없고, 아예 모르는 것이라면 내가 무엇을 탐구해야 할지도 모르니까 탐구를 시작할 수 없겠지.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탐구의 패러독스'이다. 소크라테스는 모르는 것은 철저히 탐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메논의 말마따나 탐구하고자 하는 대상이 아예 모르는 것이라면 우리는 탐구를 시작조차 할 수 없다. 메논은 바로 그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옹호자로서 하나의 해결책을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탐구해야 할 분야는 '아예 모르는 것'이 아니라 '희미하게나마 알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의 탐구 대상은 아직 전혀 모르는 것, 혹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라는 양극이 아니라 오히려 무지와 앎 사이의 회색지대이다. 그리고 이 회색지대를 떠돌고 있는, 무언가 알듯 말듯한 것을 알고자 하는 것이야말로 탐구라는 것이다.


 플라톤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상기설 anamnesis'을 제시한다. 이에 따르면 인간의 영혼은 원래 이데아계, 즉 만물의 원형과 본질의 세계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육체를 입고 세상에 태어나기 위해 이데아계를 떠나면서 망각의 강을 건너야만 하기에, 그때 본래 알고 있었던 여러 이데아를 망각하고 만다. 그렇기에 우리가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은, 실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알고 있던 것을 다시 떠올리는 것(=상기)에 지나지 않는다.


단테 <신곡>에 등장하는 망각의 강, 레테 Lethe



 상술했듯이 소크라테스는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음을 인식하고 이를 탐구하는 자세를 중시했다. 여기서 '당연하게 보이지만 실은 당연하지 않은 것'이 바로 우리가 원래 알고 있었으나 망각의 강을 건너면서 잊어버린 것들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런 것들을 생각할 때마다 알듯 말듯한 오묘한 기분에 사로잡히면서, 자신이 이걸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이로써 플라톤은 탐구의 패러독스를 논파하고, '그러니 사람은 태어나면서 잊어버린 여러 지식을 다시 떠올리기 위해 힘써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여기서 철학의 본질이 드러난다. 철학은 어디까지나 인생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기에 온갖 주제를 다룰 수 있다. 탐구하는 것 그 자체를 탐구할 수도 있으며, 사랑, 생명 등 우리의 존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들을 탐구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철학이란 단순히 탐구하는 행위를 넘어서, 삶을 새롭게 음미하기 위한 반성적 사유이자 동시에 이를 실천하기 위한 여러 방법을 고민해 보는 삶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고대 그리스는 우리가 알고 있는 철학의 기초를 정립했으며 철학적 사유의 문을 연다는 기념비적인 위업을 달성했다. 물론 이것 자체만으로도 대단하지만, 그럼에도 한계점은 명확히 존재한다. 그들의 탐구법은 현대인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전혀 논리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상기설만 해도 결론은 그럴듯하지만 결국은 신화적, 종교적 요소에 의거한 설명법이다. 이렇듯 우리가 알고 있는 논리 정연한 철학적 사유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고대 철학이, 어떤 단계를 걸쳐서 지금의 철학으로 변신한 걸까? 이 의문에 답하기 위해 다음 장부터는 근대, 현대의 철학사를 따라가며 철학 연구의 변천사를 살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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