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안녕하세요, Y입니다.
오늘따라 유독 어디를 가야 할지 고민이 되더군요. 여행 기간이 제법 긴 탓에 사실상 웬만한 곳은 다 가봤고, 그렇다고 특별한 곳을 가자니 대개 예약제로 운영되거나 입장료가 어마무시해서... 저처럼 한정된 예산으로 즐기는 배낭 여행자에게는 가격이 꽤나 가혹한(?) 편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역에서 <도쿄의 일본정원 2024>라는 책자를 입수했습니다. 도쿄 내에 있는 유명한 공원을 모아놓은 책자였는데 내용이 어찌나 알찬지, 시기별 볼거리는 물론이요 계절별로 어떤 꽃이 피는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역은 무엇이고 개장시간은 언제인지... 말 그대로 공원 백과사전입니다.
혹시 일본정원에 관심 있다면 꼭 구비하세요. 운이 좋으면 저처럼 역에서 주울 수 있지만 대개 유명한 공원에 가면 관리소에 한 권씩 비치되어 있을 겁니다.
오늘의 여행지인 히고호소카와 정원(肥後細川庭園)도 이 책자로 알게 되었죠. 한눈에 보기에도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한 달음에 달려갔습니다. 위치는 지난번에 갔었던 세키구치 대성당에서 도보로 8분 정도입니다. 조금만 더 일찍 알았다면 그날 바로 방문해 봤을 텐데 말이죠...
그래도 다행입니다. 덕분에 당신과 갈 곳이 하나 더 생겼으니까요! 겸사겸사 편지도 더 많이 쓸 수 있으니 일석이조입니다.
지브리 만화에 나올 법한 한적한 골목길을 지나서 <에이세이 문고>라고 적힌 간판 안으로 꺾어 들어가면 공원이 나옵니다. 3번째 사진에서 보이는 흰색 건물은 <에이세이 문고>로, 일본을 비롯한 동양의 미술품과 역사자료를 전시해 놓은 곳으로 유명하다고 해요. 정확히 말하자면 히고호소카와 정원의 소유주였던 호소카와 가문에서 소장했던 컬렉션을 전시한 미술관이죠. 그리고 한 가문이 이렇게나 수많은 자료와 미술품을 모을 수 있었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죠.
여기서 잠깐 호소카와 가문을 설명해 볼까 합니다.
호소카와 가문은 일본에서도 이름난 명문가입니다. 무려 남북조 시대, 그러니까 1340년대부터 위세를 떨치던 가문입니다. 에도 시대에 들어서는 히고구마모토번(현: 구마모토현)을 다스렸고, 메이지 유신 후에는 후작 지위를 얻었습니다. 말하자면 귀족 중의 귀족인 셈이죠.
이곳 히고호소카와 정원은 에도 막부 말부터 호소카와 가문의 별장으로 쓰였습니다. 그리고 메이지 시대부터는 아예 호소카와 가문의 본가가 되었죠. 이후에는 소유권이 분쿄구로 이전되어서 국립공원으로 개장되었습니다. 덕분에 국립공원이면서도 사유지 특유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 돈 깨나 바른 티가 난다는 거죠.
일단 입구부터가 다릅니다. 에이세이 문고에서 정원으로 향하는 길에는 사진에서 보이는 동그란 구조물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허리를 숙이고 그곳을 지나면 거짓말처럼 주변이 고요해집니다. 에이세이 문고에 있을 때는 그래도 조금은 사람 냄새가 났건만, 저 문을 통과하고 나니 들리는 건 새소리와 바람 소리뿐입니다. 옆에는 자그마한 사당까지 모셔져 있으니 '혹시 내가 방금 통과한 문이 속세와 내세를 가르는 문이 아닐까?'하는 상상이 들었습니다.
평지는 금방 끝나버리고 이후로는 굽이굽이 계단이 펼쳐집니다. 계단에 서서 전경을 쭉 훑어보니 새삼 이곳이 얼마나 넓은지 실감이 되더군요. 면적만 해도 도쿄 돔의 약 1.4배 이상이라고 하니, 그 크기가 상상이 가시죠?
잠깐 고리타분한 숫자 이야기는 멈추고 저와 함께 계단을 내려가 봅시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이 풍경을 당신도 직접 느껴보셨으면 해요. 투박하면서도 귀여운 나무 난간을 따라가면 어느새 주위가 고요해지고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소리와 지저귀는 새소리만이 울려 퍼집니다.
계단이 끝나면 곧바로 커다란 연못이 펼쳐집니다. 이 연못이야말로 히고호소카와 정원이 지닌 독특한 매력입니다. 히고호소카와 정원이 세워진 부지는 용수가 풍부한 곳이어서 처음부터 연못을 중심으로 정원을 둘러볼 수 있게끔 설계되었다고 합니다. 이를 池泉回遊式庭園(연못회유식정원)이라고 부르죠. 연못은 주변 조경과도 굉장히 잘 어우러져 있어서 연못과 거기에 비치는 나무만 봐도 별다른 조형이 필요 없을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특히 2번째 사진에서 보이는 단풍나무는 이곳을 단풍 명소로 만든 일등 공신입니다. 아쉽게도 제가 갔을 때는 아직 10월 초여서 단풍은커녕 녹음만 가득했지만, 그래도 나름의 매력이 있죠? 연못이 주변 식수를 고스란히 비추고 있어서 연못 밖을 한 번 봤다가, 연못 안에 담긴 풍경을 다시 보면 볼거리가 두 배로 늘어난답니다. 거울 속 세상을 보는 재미가 있으니 당신도 한 번 해보세요. 게다가 단풍이 절정을 맞이하면 야간 개장과 더불어 라이트업 이벤트도 준비된다고 하니 또 다른 매력적인 정경을 감상할 수 있을 겁니다.
연못 둘레길을 따라서 인상적인 소나무와 등롱이 늘어서서 이색적인 분위기를 풍깁니다. 연못 주위에 충만한 심록과 조형물을 구경하니 저도 모르게 귀족이 된 기분이 들었어요. 틀림없이 호소카와 가문 사람들도 이곳을 거니면서 신선놀음을 즐겼을 겁니다.
일직선으로 쭉 뻗은 길 끝에 도착하니 어느덧 마지막 행선지가 보였습니다. 송선각(松聲閣; 쇼세이카쿠)이라 불리는 이곳은 호소카와 가문의 전용 교육기관이었습니다. 1층은 유료 예약제로 다도실이나 모임 장소로 사용할 수 있고 2층은 무료 전망대입니다. 그곳에서 정원 전경을 바라볼 수 있었어요. 흔들의자에 앉아서 천천히 바깥을 바라보고 있으니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딱 명상에 좋은 분위기여서 한 30분은 넘게 앉아 있었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느낀 점은 일본에는 도심 속 공원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겁니다. 한국이었다면 개발이라는 핑계로 진즉에 싹 밀어버리고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을 텐데, 그에 비해 일본에는 자연경관이 잘 보존된 편이어서 아무리 도심에 살아도 쉽게 산수를 즐길 수 있죠. 거기다 단순히 환경 보전을 넘어서 그곳에 얽힌 역사와 이야기까지 고스란히 담아낸 만큼, 그 가치는 비할 바가 없습니다.
당신도 다음에 일본을 여행하실 때는 꼭 한 번 공원에 들러보세요. 그곳에 담긴 사람 내음과 자연의 향기가 마음에 여유를 가져다줄 거예요. 사람이 많은 곳에 지친다면 어디서나 공원에서 숨 돌릴 틈이 생긴다는 것, 잊지 마시고요. 오늘 편지는 이만 줄이겠습니다.
그럼 안녕.
2024년 어느 쌀쌀한 가을, 히고호소카와 정원에서
Y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