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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요양원에 계신 엄마

4남매의 당번제로 매주 교대로 요양원 방문기

by 사진찍는 연구원

2009년 어느 날 어머님이 요양병원에 가셨다.

지금이 2024년 어느덧 15년 전의 일이다. 당시 연세는 겨우 73세였다.

요양원에서 조금 낳아지시면 집으로 가고 싶다 하셔서 집으로 모시고 평일에는 재택요양 보조 회사에 간병을 의뢰하면 간병인은 09시 ~ 15시까지 집에 오셔서 청소하고 밥하고 가끔 목욕을 시켜주시는 일을 하셨고, 당신의 자식 4남매는 각자의 직장에 다니다가 주말이면 천안의 집으로 모였다. 집에 몇 달 잘 계시다가, 다시 나빠지면 요양병원으로 모셨다. 이렇게 몇 회를 반복하다가 몇 년 전부터는 요양병원에서 집에 가자는 말씀을 안 하신다. 이제 어머님의 집이 있는지도 모르시는가 보다.

‘등위에 아가가 있어’

‘애기 잘 봐줘라’

이렇게 반복적으로 말씀하신다는 요양병원 어머님 담당 간병인의 말씀을 듣기도 했다. 치매가 오려나보다. 천안의 여러 요양병원 요양원을 옮겨 다니다가 가장 어머님의 맘에 들어하시는 아산의 요양병원에 정착하셨다.

2012년 요양원 초기 건강해 보이는 어머님

어머님의 명절 풍경 회상 (며느리 잡기)

명절 때면 어머님은 추석에는 송편을 한 말 이상을 하시고, 부침개를 많이 하시고, 강정을 많이 만드셨다. 명절준비를 최소 2개월 전부터 하셨다. 설날에는 묵을 쌀을 이용하여 가래떡을 방앗간에서 만들어와 집에서 살짝 말려 칼로 일일이 이쁘게 잘라 떡국용으로 만들어놓았다. 많은 양을 썰어야 했기에 칼을 잡은 손에 물집이 생기곤 했다.

한석봉의 어머니 신사임당의 교육사례로 유명한 '등잔불 일화'를 떠올리며 열심히 썰었다. 등잔불을 끄고 아들에게 하시는 말씀 “나는 떡을 썰 테니 너는 붓글씨를 쓰거라”


이 명절 준비는 오로지 어머님의 유일한 남편을 그리워하며 만드는 음식들이었다.

며느리들은 명절 이틀 전 시댁 천안에 집합하여 사나운 시어머니 감독하에 종일 음식을 만들었다. 처음에 세 며느리는 불만 없이 잘도 따랐다. 그중에 큰며느리가 가장 열심히 하셨다. 한 해 두 해 지나면서 며느리 들은 불만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집에 싸가면 냉동실에서 몇 달 있다가 버리게 되는 명절음식들을 왜 이렇게 많은 음식을 만드시는지 모르겠어요" "그냥 시장에서 사다가 제사상을 준비하면 좋겠어요."

매년 김장철이 되면 또다시 며느리들을 집합시켰다. 손이 크신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나누어주기 위해 많이도 담으셨다. 배추 다듬기, 소금에 배추 절이기, 김장양념 만들기 (무채썰기, 미나리 썰기, 파 썰기, 마늘 까고 찧기, 찹쌀죽 쑤기, 고춧가루 준비하기, 굴 씻기) 다 준비되면 어머님의 배합비율대로 양념 버무리기, 마지막으로 절임배추에 양념 넣기 이러한 김장 담그기 과정은 2일 이상이 소요되었다. 김장 담기에 불만이 가득했던 자식과 며느리들은 어머님을 말씀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김장 담기는 오래전 어머니의 건강이 안 좋아 지신 이후 바로 사라졌다.

화면 캡처 2024-12-01 074733.jpg 2013년 요양원에서 집으로 오신 어머님

계속되는 요양원의 주말 문병

처음 요양원 입원에서 지금까지 15년간 거의 매주 4남매는 번갈아 가며 요양병원에 어머님 좋아하시는 맛있는 과일과 빵, 간식거리 두유 등 등을 사들고 문병을 다니고 있다.

자식이 넷이니 망정이지 하나였으면 아마도 어머님은 한 달에 한 번꼴로 그리워하며 자식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매번 다녀오고 나면 가족 밴드에 방문기를 간단하게 올린다. 어머님 사진 한 장과 건강 여부를 공유하는 공간이다. 갈 때마다 아쉬움이 남는다. 얼마나 더 사실까? 치매가 심해지셔서 자식들마저 못 알아보면 어떡하지? 계속되는 요양원의 방문은 자식들을 지치게 할 만도 한데 자식들은 거의 빠지지 않고 열심히 주말마다 어머님을 뵈러 간다. 이러한 천안의 주말 문병 일정은 중등학교 교장 선생님 큰 형님께서 짜고 형수님께서 회비를 걷어 매달 백만 원이 넘는 비용을 지출하고 추가 비용도 지출된다.

20200606_182354.jpg 2020년 6월 코로나 시절의 요양병원 면회 (간식만 넣어 드리고 전화드리면 창가로 오신다.)

요양원에서 상대적으로 건강하던 시기, 요양원에서 대장 노릇하시던 어머님은 늘 자식 자랑을 하셨다.

"우리 애덜은 전부 대학을 나왔써어~~~"

"큰 아들이 교장 선생님이여~~~"

"둘째 아들이 서울에서 커다란 연구소 댕겨어~~~"

"막내아들도 며느리도 인천에서 선생님 혀~~~"

"막내딸은 시청 댕겨~~~"

옛날에는 여덟 가지 자랑은 팔불출이라 해서 절대로 하면 안 되는 자랑이었다. '자기 자랑, 배우자 자랑, 자식 자랑, 학벌 자랑, 가문 자랑, 형제 자랑, 친구 자랑'

주말 요양원에 다니면서 그래도 우리 어머님은 '자식을 넷이나 두어서 행복하신 요양원 생활을 하시고 계시는구나. 자식이 하나나 둘이면 주말마다 문병을 올까? 과연 나가 요양원에 누워있으면 우리 딸과 아들이 매주와 줄까? 요양원에서 생활하지 않도록 건강하게 살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해야지. 그런데 과연 소원대로 요양원에 가질 않고 살다가 죽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늘 그리운 어머니 얼른 일어나셔서 어릴 적 어머님과 함께 하던 산에 도토리도 주으러 가고, 주변에 맛있는 거 먹으러 가고, 돌아가신 아버님 산소에도 올라가고, 명절 때면 며느리들 괴롭히던 일도 같이 해보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날이 갈수록 더 약해져 가는 어머님의 목소리에 안타까운 마음이다. 이렇게 라도 100세까지 살아 계셨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20240706_100909.jpg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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