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남매를 하숙으로 키워내신 엄마
어머니
억척스럽게 살아오신 그분
그리 시골은 아니지만 그리 도시도 아닌 천안에서 박봉의 9급 공무원이셨던 아버님과 함께 자식 넷을 억척같이 키우셨다.
천안으로 이사하게 된 것은 공무원 아버님의 잦은 인사 발령으로 여기저기 이사를 많이 다닐 수밖에 없었다. 내가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 천안의 성거읍에서 천안 시내인 봉명동으로 이사를 하면서 어머님의 하숙이 시작되었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8)와 형(12) 미취학생 남동생(6), 여동생(3)이 있었다.
어머님은 "오동목공소 뒷집 하숙집 아줌마"로 불리셨다.
천안의 집을 계속 개조하여 방을 여러 개 만들고 거기에 인근 고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숙을 하셨다.
하숙비는 아마도 매달 28,000원을 받은 것으로 기억한다. 하숙생 총 15명 2인 1실 독방은 조금 더 바 싸게 받았다. 학생의 구성은 천안 인근의 시골에서 유학온 학생들이 많았다. 고등학교는 실업계인 천안농고, 천안상고, 천안공고, 천안여상 인문계고등학교는 천안고등학교, 천안중앙고, 천안여자고등학교, 복자여자고등학교 이렇게 있었다. 당신 천안북일고등학교는 없었다.
천안고등학교 인근에 위치한 우리 집에서 천안고등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하숙집을 운영했다. 학생들의 대부분은 천안 인근의 소도시에서 중학교에서 공부 잘한다는 애들이 천안으로 유학 오는 사례가 많았다. 충청남도에서만 올 수 있어서 아주 공부 잘하는 애들은 대전으로 가고 그다음 잘하는 애들을 천안으로 왔다.
어머님은 매일 4시에 일어나 하숙생의 아침과 점심을 준비하셨다. 아침은 밥으로 점심은 도시락으로.
야간 자습이 늘 10시까지 하던 시절, 한때는 저녁까지 준비하여 도시락을 두 개씩 마련하여 학생들에게 나누어 들고 가게 하셨다. 학교에서 도시락 두 개 싸 오라고 권장을 했나 보다.
어때부터인가는 아침은 밥상에서 점심은 도시락으로 그리고 저녁은 갖지은 밥으로 만든 도시락을 15개 만들어 학교로 가지고 가면 하숙생들이 교문에 나와 받아가는 형식으로 밥 배식 시스템으로 변경하기도 했다.
어머님은 하숙생들에게 제공할 맛있는 음식 중 일부는 자식을 위해 별도 관리하시기도 하셨다. 그래도 가장 신경을 쓰셨던 밥은 아버님의 밥이었다. 전기밥솥과 냉장고가 없던 시절 아버님의 따뜻한 밥을 위하여 늘 새로 한 밥의 첫 번째 밥그릇에 아버님 밥을 고이 담아 아랫목에 놓고 이블을 덮어 보온을 유지하고 아버님 퇴근 하시길 기다리셨다.
아버지의 퇴근 소리는 단순하다 오토바이 소리가 다가오면 아버님이 오시고 계신 거다. 어머님과 네 자식들이 우루르 달려 나가 아버지의 오토바이를 맞이한다. 그리고 그 오토바이를 애지중지 거실로 끌고 들어온다. 너무나 소중했던 오토바이였기에 밖에 세워 놓을 수 없었다.
하숙생에게 방을 양보하고 얼마간 한가족 여섯 명이 한방에서 지냈다. 늘 가장 좋은 자리인 아랫목은 아버님 자리였다. 형이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2인 1실 하숙생방에서 생활하면서 한방에는 다섯으로 줄었다.
하숙집의 난방은 연탄이었고 음식 조리 연료도 연탄을 사용했다.
연탄에서 나오는 연탄가스로 인하여 일부 하숙생이 중독되어 병원으로 실려 간 적도 있었고, 나와 형이 함께 쓰는 방에 심한 연탄가스의 유입으로 병원에서 깨어난 적도 있었다. 다행히 죽은 학생은 없었다.
몇 년이 지나 LPG통이 배달되어 오면서 연탄불로 음식 만드는 데는 사용하지 않고 그 편리한 LPG가스레인지를 사용하게 되었다.
난방으로 사용한 연탄아궁이에서 연탄보일러로 하나둘 교체가 되면서 연탄가스 중독문제는 거의 사라졌다.
연탄아궁이는 연탄을 직접아궁이에 넣어 연소시켜 방구들을 가열하는 방식으로 열효율이 낮고 방 아랫목만 뜨거워 이블 태우기는 경우가 많았다.
연탄보일러는 방바닥에 파이프를 깔아 연탄의 열로 온수를 순환시켜 방이 골고루 따뜻했다. 연탄보일러 방식은 당시에 신기한 난방방식이었다.
하숙생방과 자취생방으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자취생 방의 경우 작은 부엌에서 밥을 잘도 해 먹었다. 냉장고도 전자레인지도 전기밥솥도 없는 시절 재미있게 잘도 살았다.
어머니는 어린 막내딸을 제외한 우리 3형제에게 연탄 관련 일을 시키셨다.
시간 되면 연탄을 갈아 넣어야 했다. "옆에 세 번째 방에 가서 불붙은 연탄 위 것을 안방으로 옮기고 세 번째 방에는 새 연탄을 올려놓아라 구멍 잘 맞추어서" 어머님은 그 많은 방에 연탄의 연소속도를 다 기억하고 계셨다.
연탄불이 꺼지면 춥다고 날 리가 난다.
연탄이 다 타고나면 그 연탄재를 겨울에는 우리 집 진입로에 들고나가 빙판 방지용으로 던져 잘 깨서 처리하는 일을 시키셨다. 별도로 연탄재를 길옆에 내놓으면 청소하는 아저씨들이 일부 처리해 주시도 하셨지만 많은 연탄들을 진입로에 버려졌다.
그 와중에 남은 음식처리를 처리를 위하여 문 앞에 똥개 한 마리, 돼지우리를 만들어 돼지를, 토끼장 만들어 토끼 여러 마리, 닭장도 만들어 닭도 키우셨다. 돼지우리와 토끼장, 닭장, 개집은 아버님께서 만드셨다.
어머님은 닭도 잘 잡으신다. 토끼도 잘 잡으신다. 당시 "대학까지 나온 며느리가 닭도 못 잡냐"하고 구박하던 시절이었다. 돼지는 다 크면 도살장에서 돼지를 사가지고 가셨고, 개는 1년만 크면 개장수가 와서 사가지고 가셨다. 어머님은 개와 돼지까지는 못 잡으셨다.
서로 사이좋게 지내며 열심히 공부하여 우리 집 하숙생들 좋은 대학도 많이 갔다.
그렇게 천안고 앞의 하숙집이 잘 운영되어 번돈으로 형님이 대학에 입학할 무렵 어머님은 중대 결단을 하셨다. 수많은 연탄아궁이에서 해방될 수 있는 기름보일러를 사용하는 집, 방 개수가 더 많고 월세방과 하숙을 겸할 수 있는 천안시 신부동에 위치한 더 큰집으로 이사를 갔다.
월세방 여덟 개, 하숙방 일곱 개가 있는 비비안을 만드는 남영나이론 회사 근처에 위치하여 월세는 걱정 없는 그런 집이었다. 새로 생긴 천안북일고등학교(1976년 3월 개교)와 인근에 있었지만 이 버는 학생대상 하숙이 아닌 공사장의 작업인부들을 대상으로 하셨다. 당시 천안에 큰 공장을 건설하고 있었다. 담배인삼공사의 담배 만드는 공장을 천안 전매서라고 했다. 공사 기간이 3년 ~ 4년 정도였던 것 같다. 공사장 인부들은 주로 미장공사를 하시는 분들이었다. 인부들을 인솔하는 대표의 지휘로 모두 일사 분란하게 아침 6시에 밥을 드시고 점심은 어머님께서 20인분의 밥을 해서 머리에 이고 배달을 하셨다.
간신히 배달을 마치고 돌아오시면 바로 저녁을 준비하셨다. 인부들은 6시 정도에 돌아오셔서 두 분 세분 정도 한방에서 생활하셨다. 매달 하숙비는 당시 아버님의 월급보다 훨씬 많은 금액을 현금으로 주셨다.
형님이 무사히 충남에 위치한 사범대학에 입학을 해서 유학을 떠났고 나도 인근의 북일고에 입학과 졸업을 하고 대학에 입학하면서 어머님의 길었던 하숙이 종료되었다.
억척같은 어머님은 당시 철인이셨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 밥 해주느라 엄청 힘들어하셨다. 힘든 일 하시니 매일 아프셔서 진통제 같은 약을 많이 드셨다. 어머님은 아들 셋과 딸하나를 모두 대학까지 졸업시켰음에 만족하시고 좀 쉴만한 시절에는 막내딸이 시집을 가서 낳은 아이 둘을 돌보아 주시느라 다시 고생이 시작되었다. 어려운 손자 손녀 봐주기가 끝날 무렵 5급으로 승진하셔서 농촌지도소(현 농업기술센터) 소장으로 근무하시던 어느 날 갑자기 돌아가셨다. 이제 편히 사실일만 남은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는데 그리 허무하게 돌아가고 나니 너무 상심하셔서 그 후 늘 아프셨다.
지금은 요양원에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