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보이기는 개뿔
비 오는 수요일이다. 수도권은 눈이 오고 있으려나..? 친구의 가게를 봐주고 어제저녁 부산에 도착했다. 하루만 더 봐달라고 했던 것이 결국 주말을 지나 화요일 오전에 끝이 났다. 1주일을 넘게 집 떠나와있던 것이었다. 3~4일만 가게 좀 부탁한다는 친구의 말을 철석같이 믿은 나와 내 와이프는 점점 피폐해져 갔다. 어제저녁 집에 도착했을 때에는 와이프가 뛰어나와 철부지 딸내미처럼 나를 꼭 끌어안는다.
와이프 : 고생했어. 진짜..
나 : 응, 자기도 고생 많았지?
와이프 : 나 진짜 힘들었어.. 밥부터 먹자!
때늦은 저녁식사를 와이프는 내가 오길 기다리며 함께 먹고 싶어서 계속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 이게 얼마만의 집밥인가.. 평소 요리를 잘하지 않는 와이프가 쪽갈비 김치찜을 푸짐하게 해 놓았다. 나는 허겁지겁 밥 한 공기를 금방 뚝딱 비웠고, 밥 먹는 속도가 느린 와이프는 여전히 김치를 찢으며 옹골지게 오물오물하며 마지막 밥 숟가락을 들었다.
나 : 자기도 나 기다린다고 배 많이 고팠었겠다.
와이프 : 응, 오빠가 평소에 밥 해놓고 나 기다리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겠더라.
나 : 뭐.. 좋은 현상인 듯..?
와이프 : 근데 오빠 아까 안을 때 홀아비냄새가 나던데..
나 : 아.. 그래?
와이프 : 응, 일단 조금만 소화시키고 샤워부터 해야 될 것 같아.
예상치 못하게 늘어난 서울일정에 딱 3일 치만 들고 올라간 속옷과 옷가지들로 1주일을 버티기엔 너무 무리였나 보다. 꾸준히 등산을 하겠다고 다짐하면서 구매했던 등산가방 가득 꾹꾹 눌러 담은 옷가지들을 하나씩 꺼내었다. 한 번에 많은 빨래거리가 생겼다. 입고 있던 옷의 주머니에서도 지갑과 전자담배, 봉투를 내려놓았다. 봉투?? 이게 웬 봉투?? 무슨 봉투지?
나 : 어? 이게 뭐야? 돈인가??
와이프 : 왜?? 뭔데??
나 : 헐.. 돈이다!
와이프 : 오.. 이게 무슨 돈이야??
나 : 하나 둘 셋넷.. 서른아홉, 마흔?
와이프 : 이거 00 오빠가 넣어둔 거 아냐??
나 : 엥? 나 있는 동안 매출이 200도 안 나왔는데 200만 원을 줄 수가 없는데?
와이프 : 전화해 바바 얼른
곧바로 친구에게 전화했고 이 봉투의 출처는 친구가 맞았다.
나 : 마! 이 봉투 니가 넣었나?
친구 : 자슥이.. 그 이제 봤나? 허허
나 : 뭐 이리 많이 넣었노?? 니 이번달 적자다 임마
친구 : 적자 뭐 하루이틀이가? 골 때리는 알바 써서 돈 줄 바에야 내가 안 남아도 니한테 더 챙겨주는 게 속이 훨씬 편하다.
나 : 그래도 이건 너무 많은데? 계좌 불러라 다시 붙일게
친구 : 그럴 줄 알고 내가 현금으로 준거다 빙신아
나 : 줄 거면 말을 해야지 그래도. 만약에 내가 가다가 흘렸으면 어쩔 뻔 했노?
친구 : 안주머니에 꼬깃넣어가 지퍼까지 내가 잠겄는데 니가 안 열면 누가 열겠노?
나 : 하.. 이 새끼. 골 때리네..
친구 : 됐다 마~ 어차피 내 이미 가게 내놨다. 아직 안 나가서 그렇지. 정리하면 부산 내리갈끄다. 그때 소주나 한잔하자.
나 : 일단 알았다. 급하게 팔지 마라. 권리금 잘 챙기고 부산 내리온나이
그렇다. 친구는 이미 내가 오기 전에 가게를 매도할 계획이 있던 상태였던 것이고, 지속된 적자로 인해 더 이상 바닥 치기 전에 손해를 최소한으로 만들자는 것이었다. 씁쓸하지만 맞는 선택일 수도 있다. 대부분의 자영업자들은 시장동향을 파악하기보단 본인 가게의 서비스나 메뉴선정 및 개발에만 몰두하고 있다. 주식투자를 처음 하거나 초보인 경우도 그렇다. 내가 어떤 주식을 매수했는데 주가가 떨어지면 다시 반등할 거라는 희망회로만 돌리며 기다리고 버티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어떤 이는 떨어져 있으니 저렴할 때 구매해야 한다며 재무제표도 확인하지 않은 채 몽땅 구매해 버리는 경우도 있다. 다른 건 다 모르겠고 이것 하나만 기억하자. 주가가 떨어지기 시작한다면 손해를 복구하려는 생각보단 더 큰 손해를 막기 위해 매도하는 것이 최선책이고, 장사가 잘 되지 않아 짧지 않은 기간 동안 흑자를 보지 못했다면 그나마 권리회수 기회가 있을 때 빠르게 전환하는 것이 또 다른 기회이자 시작일 수 있다.
나 : 이거 친구가 넣은 거 맞대.
와이프 : 헐.. 왜 이렇게 많아?
나 : 어디 뭐 복권이라도 당첨됐나 보지 뭐..
와이프 : 복권 당첨됐으면 좀 더 주라 그래
나 : ㅋㅋㅋㅋ 자기도 참...
와이프 : 너무 속물 같았다 그치?
나 : 아니? 솔직한 건데?
와이프 : 근데 1주일에 이 정도 줄 거면..
나 : 응??
와이프 : 한 달 있다 오지 그랬어
나 : 응???
와이프 : ???
나 : 지금은 너무 심하게 솔직했는데??
와이프 : 또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달라그래
나 : 아주 이제 대놓고... 하하
와이프 : 농담이야~
나 : 그치 ??
농담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안다. 와이프의 눈빛에서 순간 빛이 반짝거렸다는 것을. 가벼운 담소를 나누고 샤워하러 들어가기 전 화장대에 있는 약봉지를 발견했다. 요즘은 약봉지에는 이렇게 생긴 약이 어떤 성분과 효능이 있는지 잘 설명되어 있다. 위장보호, 장보호 등등 위장을 편하게 해주는 제조약인가 보다 했다. 그리고 샤워하고 나온 후에 와이프에게 물었다.
나 : 화장대에 약봉지 있던데 그거 자기 거야??
와이프 : 어? 어어
나 : 왜?? 뭐? 어디 안 좋아??
와이프 : 아니.. 오빠 가고 난 뒤에 자꾸 녹색 변이 나와서 간이나 신장 쪽이 안 좋은가 싶어서 병원 갔었거든.
나 : 엥?? 녹색변??
와이프 : 응. 그래서 병원 가서 진료받고 약 사 온 거야.
나 : 왜?? 자기 송충이야? 애벌레야? 녹색변을 왜 싸..
와이프 : 다른데 문제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렇대.
나 : 아.. 자기 스트레스받으면 위장꼬이자나.
와이프 : 근데 아픈 건 아닌데 변 색깔이 그러니까 신경 쓰여서~
자세히 얘기하진 않았지만 와이프는 내가 가고 난 뒤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휑한 집에 혼자 있어서 무서웠던 것이다. 새벽에도 자주 깨다 보니 스트레스가 몸의 이상신호로 왔던 것이다. 미안했다.
나 : 이제 멀리 안 나갈게~
와이프 : 응. 나 진짜 힘들고 무서웠어.
우리 집 고양이 하루보다 더 분리불안이 있는 와이프는 내가 없는 날엔 늘 괴로워했다는 사실을 잠깐 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짧게나마 생각을 했다. '아.. 외박은 이제 물 건너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