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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돌돌 Mar 16. 2021

녹동항에는 성실이발소가 있다

살아가는 이야기




소록도 해안도로, 대기는 무거웠다. 해풍은 아름드리 소나무 가지의 손을 흔들어댔고, 해무는 빠른 속도로 저만치 금산의 적대봉을 움직이고 있었다.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이발을 하기 위해 나는 녹동항으로 가고 있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었을까. 단골집 미장원이 문을 닫았다. 녹동의 소문은 늘 빠르다 바람보다 먼저 지나가고 일순 구름처럼 퍼지기도 한다. 직원들과 술잔을 기울이다 보면 미용사의 은닉하고 싶은 농염한 비밀도 안주거리로 팔딱거린다. 


얼마 전 술 자리에서는 자주 갔던 단골집 미장원의 젊은 날 치기스런 이야기들이 농도 큰 소문으로 번성하고 있었다. 소문은 늘 라이트급으로 나갔다가 헤비급으로 돌아오기에 나는 그 소문의 진위에 대해 고개만 주억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득 직원이 다녀 갔다던 이발소가 생각났다. 성실이발소였다. 그저께 직원이 갔다왔는데 소록도에서 왔다고 하면 이발도 잘해주고 이발비도 조금 깎아 준다고 했다. 핸들을 꺾었다. 녹동항에는 성실장어집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성실이발소도 있고 성실슈퍼도 있다. 녹동하고 성실하고 어떤 인과관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녹동항 사람들은 성실을 달고 사는 것 같다.


성실이발소는 골목길 사거리 맞닿은 성실슈퍼 옆에 있었다. 도로 한 켠에는 고물상이 있었는데 그 집의 울타리에 피어있는 붉은 장미꽃은 정분이 날정도 고혹적이었다. 올 봄, 우연찮게 지나가다가 흐드러지도록 붉게 핀 장미에 취해 쉼 없이 넋놓아 바라본 적이 있었다. 


이발소 문을 열고 들어 갔다. 안쪽으로 성실슈퍼 쪽문이 나있었다. 성실이발소와 성실슈퍼는 자웅동체였다. 성실이발소는 사장님이 운영하고 있었고 성실슈퍼는 사모님이 운영해가는 것 같았다. 


이발소 사장님은 연세가 지긋하셨다. 먼저 온 손님이 이발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일요신문을 추적이면서 대기하고 있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이발소 의자에 앉자마자 그 전에는 미장원에 다녔었는데 소록도 직원의 추천으로 이곳에 오게 되었다고 나는 선대답을 했다. 


이발소 사장님은 묻지도 않았건만 이발은 예술이라며 가위로 대충 자르는 미장원하고 차원이 다르다고 짐지 이야기를 했고 그것이 남자가 이발소에 가야 하는 이유라고 부연했다.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듣고만 있었다. 사장님의 말에는 흡사 이발에 대한 장인정신이 스며있는 것 같았다. 


먼저 머리에 비누거품을 묻혔다. 어려서 이발하는 형태를 그대로 움켜쥐고 있었다. 가위질을 하기 시작했다. 긍정적으로 보면 차분함과 여유로움이었고 부정적으로 보면 깎는 속도가 하세월이었다. 


미장원에서는 이발기로 머리 가장자리를 한번 두르고 그다음에 솎고 또 정리하는데 15분이면 충분했었다. 그런데 이발소 사장님은 깎는 속도도 느린데다가 느닷없이 전화를 받더니 소나기가 와서 빨래를 걷어야 된다며 내 머리에 비투거품을 잔뜩 발라놓고는 댓바람으로 휘여휘여 나가는 것이 아닌가.  


빨래를 걷고 들어오시는데 옷이 흠뻑 젖어 있었다. 천천히 수건으로 젖은 머리와 옷을 다 털고 또다시 머리를 깎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옆의 슈퍼의 딩동하는 벨소리를 냈다. 손님이 왔다는 신호였다. 사장님은 아무렇지 않은 듯 이발기를 깨끗하게 솔로 털어 진열장에 올려놓고는 유유자적하며 슈퍼로 가서 손님을 받았다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행여 근무 시간에 늦을 세라 점심도 굷고 왔건만 이발하는 속도로 봐서 여차하면 1시 넘어서 들어갈 것 같았다. 하지만 보챈다고 해서 속도가 날 것 같지도 않았다. 문득 중학교 국어시간에 배운 윤오영의 '방망이 깎던 노인'이 생각났다. 


그 수필에서는 여유있고 신중하게 방망이를 깎는 노인과 기차 시간을 놓칠까봐 조급해하는 작가의 행동을 수필에 대입시켜 우리의 전통의 중요성 시사하고 있었다. 지금도 명료하도록 그 수필이 떠오르는 것은 그만큼 학창시절에 느꼈던 감동이 크게 밀려들었기 때문이리라.  


또다시 슈퍼에 손님이 들어왔다. 내 마음은 소록도를 앞질러가고 있었지만 사장님은 천하태평이었고 여유작작했다. 마치 시간을 잃어버린 마을에 사는 것 같았다. 손님을 받은 후 다시 내게로 와서 느릿느릿하게 이발기계를 갖다 댔다. 나는 그런 상황에서도 망태를 두르고 있어서 시계조차 볼 수 없었다. 사장님은 머리를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이제는 숫제 한 올 한 올 머리카락을 다듬겠다는 처사였다. 정작 마음이 호들갑스러운 것은 나였다.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이발이 완성되었다. 이제는 머리 감는 것으로 이발이 갈무리 될 것이다. 그런데 머리 감는 것도 부지세월이었다. 미장원에서는 한두 번 샴푸질 하고 한 두 번 헹구면 끝날 것을, 비누칠과 샴푸질을 연거푸하고 연신 바가지로 물을 떠서 머리를 헹구고 있었다. 


사실 나는 미장원에서 머리 감겨주는 것을 그닥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  데면데면하게 샴푸칠을 하고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이 머리를 감긴 후에 '다 돼습니다' 하는 것이 마뜩찮았다. 샴푸는 몸에 해로운 합성세제인데 대충 머리를 헹구면 계면활성제가 머리에 고스란히 남아있을 것이다. 그래서 미장원에서 이발을 하면 바로 집으로 가 다시 머리를 감고는 했었다. 


하지만 이발소 사장님은 마치 내가 집에서 머리 감는 것처럼 깔끔하게 헹궈줬다. 이발은 정확히 12시 50분에 끝났다. 이발소 사장님은 지금은 머리가 길이 안 났다면서 앞으로 좋아질 테니 꼭 단골손님으로 오라고 하며 얼마의 이발비도 깎아주었다. 


소록도에 들어오면서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이발소 사장님처럼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잃어버리는 세월만큼 차분함을 얻어가는 것일까. 아니면 추억하는 것보다 잊혀지는 것이 더 많아서 가벼워지는 나이일까. 어쩌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박경리 작가의 말처럼 버릴 것이 늘어나 홀가분해져 가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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