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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돌돌 Apr 25. 2021

뽑기의 기억은 어디로 갔을까

살아가는 이야기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다. 없이 사는 집은 지붕도 낮다고 하던가. 핫도그 하나 사 먹는 것도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때 나는 무슨 배짱으로 못 쓰는 문구나 장난감을 가지고 뽑기 표를 만들어서 아이들을 유인했는지 모르겠다. 


우리 반에 부잣집 아이가 있었다. 몸이 암팡졌던 그 아이는 매일 20원을 가지고 등교를 했다. 아침부터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서 내게 보여주며 '점심때 호떡 사 먹을 거다. 호떡'하면서 '헤헤'하고 능글한 웃음을 흘리며 놀리는 녀석을 볼 때마다 나는 부럽기도 하고 약도 올라 배때지를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어느 날 방과 후 집에 갈 때였다. 우리 집 옆에 있는 고물상에 연신 눈길이 가 닿았다. 그 안에는 아이들의 호기심을 유발할 수 있는 물건들이 다양했다. 팔이 빠진 로봇이며, 모터가 고장 난 장난감 탱크, 스포츠카 모형의 자동차도 있었지만 결코 무지렁이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개중에는 제법 잘 사는 아이들이 실증 나서 버린 멀쩡한 장난감과 동화책도 있었다. 


심지어 소년중앙이나 보물섬 같은 연도가 지난 만화책도 있었고 동아전과나 표준전과도 있었다. 선생님이 보시던 지도교사용 월간 학습지도 있었다. 나는 곰곰이 눈을 감고 있다가 손바닥을 딱 쳤다.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물건들만 골라서 고물상 아저씨한테 얼마냐고 물었다. 아버지 친구였던 고물상 아저씨는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그냥 가져가라고 손짓했다. 


나는 그것들을 집에 들고 와서 뽑기 표를 만들었다. 갱지를 균형되게 잘라 경품을 쓰고 그것이 보이지 않도록 두 번을 접어 공책 뒷면에다가 편편히 풀로 붙였다. 그 다음날 학교에 가서 좌판을 깔았다. 한번 뽑는데 50원이었지만 사위에는 아이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뽑기는 대박이었다. 아이들은 50원의 뽑기에 열광했다. 아이들이 뽑은 모터가 고장 난 장난감이라도 외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데 만족을 했고, 움직이지 않는 탱크라 할지라도 위용이 도도하게 살아있는 모습에 놀라워했다. 또 소년중앙이나 보물섬 같은 책들은 해가 지났지만 50원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더욱이 소공녀 같은 동화책이나 단행본 만화책은 아이들에게 말 그대로 횡재였다. 



뽑기는 늘 아이들을 기대하게 만들었고 주위는 아이들의 설렘으로 환하게 밝아졌다. 그다음 날부터 방과 후에 고물상으로 가서 아이들 좋아할 만한 물건들을 쓸어 모았고 어느 정도 모이기만 하면 뽑기 표를 만들어 전 학년을 돌며 난전을 펼쳤다. 뽑기 표는 가져갈 때마다 대박이 났고 내 주머니는 그만큼 볼록해졌다. 


20원 가지고 호떡 사 먹겠다며 나를 놀렸던 아이는 더이상 나를 놀리지 않았다. 나는 벌어들인 돈 가지고 점심시간이나 방과 후에 분홍색 쏘세지가 안에 들어간 핫도그도 사 먹고 그 좋아하던 만화방에도 갔다. 돈의 유희는 즐거웠다. 친한 친구들과 나누어 먹는 과자는 더 달고 맛있었다.  동전은 내 주머니 속에서 늘 짤랑짤랑 행복한 비명을 질러댔다. 


돈이라는 위력은 정말 대단했다. 누나에게 돈을 주면 고맙다며 내 손을 잡았고 동생한테 맛있는 것을 사주면 해맑게 웃었다. 나는 돈으로 인하여 뿌듯해졌고 내 위세는 도도하게 올라갔다. 주머니를 만질 때면 가득 찬 동전들은 가득찬 쌀독처럼 뿌듯하기만 했다. 


그러나 종말은 우연찮게 찾아왔다. 친구와 나는 그것이 범죄인지도 몰랐다. 고물상에다 구리를 가져가면 1 키로에 80원을 주었고 놋쇠인 황동을 가져가면 60원을 주었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종이를 재활용하는 공장이 있었는데 부도가 나서 사장이 야반도주했다. 


친구들과 나는 인적이 없는 그 공장에 가서 작업장에 함부로 널브러져 있는 금속 물건을 주워다가 고물상에 팔았다. 그것들이 떨어지자 커다란 모터를 해체하여 팔기도 했다. 많이 팔 때는 하루에 만 오천 원을 벌었다. 동업자가 세 명이었으니까 일인당 5천 원씩 분배되는, 그 당시 초등학생에게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다. 공장문이 두꺼운 자물쇠로 채워져 있어서 쪽문으로 들어가자 우리가 뜯어간 양은 창문은 새 창문으로 다시 설치되어 있었다. 우리는 겁이 나서 엉겁결에 줄행랑을 놓았다. 그 후로는 마음을 고쳐먹고 공장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새 주인이 끈덕지게 우리의 은거지를 찾을 것만 같았다. 


지금도 신명났던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보고는 한다. 돈이라는 것은 둥글기 때문에 머리만 굴리면 얼마든지 벌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돈이 둥근 연유는 둥글게 쓰라고 있는 것이다. 졸부들은 흥청망청 쓰면서 내가 내 돈 가지고 쓰는데 무슨 죄냐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것은 모르고 하는 소리다. 원화의 흐름을 무시하고 비정상적으로 쓰기 때문에 그 돈이 정상적인 사회에 환원이 되지 않는 것이다.


염세주의였고 결혼에 대해서 회의주의자였던 쇼펜하우어는 구두쇠로 유명하다. 그는 매일 밤 1원 단위로 가계부를 적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철학자가 돈 계산이나 한다며 비난하자 또 다른 명언을 남겼다. 


"나는 내가 돈 버는 재능이 전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돈을 아껴 쓰는 법을 터득해야 했다. 


돈이 제일 높은 가치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자본주의에서 사는 이상 돈은 그 사람의 명예와 권력과도 직결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의 힘을 모른다거나 외면한다는 것은 순수한 것이 아니라 무능력자의 변명으로 치부하는 것은 내가 나이를 먹어 속물로 변해가는 것 같아 한편으로 안타깝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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