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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돌돌 Sep 25. 2021

도공을 찾아서

살아가는 이야기



  이 시대의 도공이 있을까. 도공을 찾아 떠나는 일은 신명이 나고 기대가 되는 일이었다. 경남 고성에 사는 신재균 선생. 어쩌면 말로만 듣던 이 시대의 도공을 직접 만나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들자 기대와 설렘이 사위를 감싸고 돌았다. 나는 문득문득 내가 알고 있는 도공의 기억에 대해 떠올려 보았다. 


  먼저 떠오른 것이 황순원 작가의 소설 ‘독 짓는 늙은이’였다. 그 소설에서는 송염감이 삼 일 밤을 새워 정성을 다해 독을 구워놓고도 마음에 차지 않는다고 사정없이 독을 깨고 있었다. 송영감은 독을 깨면서 얼마나 많은 비감에 치를 떨었을까. 


  또 정다운 스님이 쓴 ‘위대한 침묵’도 기억도 떠올려 보았다. 고려 말 중국 사신들은 훌륭한 예술품을 창작하는 유명한 도공을 요구하면서 고려 도공의 씨가 말라가기 시작했다. 그 무렵 도공으로 유명한 황해도의 양 노인은 고려의 도공 비법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 스스로 두 눈을 바늘로 찔러 소경이 되었다. 자기의 비법을 후손에게 전수하기 위한 그의 마지막 선택이었던 것이다. 


  평산 신재균 선생, 도공 외길 50년, 인간시대에 방영이 되었고 숱한 개인전과 각종 전시전에 작품을 선보였었다. 또 우리 선조들이 그토록 지키려고 했던 진사 도자기를 구현했다. 다홍빛이 발현한 진사는 도예 기법 중 최고의 경지에 올라 임금에게만 진상했다고 한다. 


  신재균 선생의 평산도요는 경남 고성군 하이면에 위치하고 있었다. 도착할 무렵에는 잔잔히 어스름이 깔리고 있었다. 아니 산중이어서 다른 곳 보다 어스름이 더 빨리 깃들었다. 평산도요에 차가 멈추어 서자 신재균 선생의 모습이 어스름하게 보였다. 이마에는 켜켜한 세월이 더께 얹혀 있었고 눈매는 선하고도 깊이가 있었다. 


  신재균 선생은 평산도요로 안내했다. 오른 켠에는 직접 굽는 가마솥이 일자로 놓여 있었고 왼켠 전시장 안으로 들어가자 다기와 바루가 진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위층으로 올라서자 마침내 수 백 년 가슴을 저민 아름다운 유산, 도자기가 숙연하고도 정연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세계의 진귀품 중에도 꼽히는 자기, 만인이 가지고 싶어 하는 살아있는 생명체가 거기에 있었다. 저 도자기를 굽기 위해 도공들은 숱한 영혼을 불살랐을 것이다. 가슴으로 도자기를 굽기 위해 혼혼히 불 속으로 뛰어 들어가 하늘이 내린 도자기를 빚었을 것이다. 


  신재균 선생은 말이 없으셨다. 그저 다기에 녹차가 비워지면 채워 줄 뿐이었다. 아니, 그분은 가만히 자세를 곧추세워 앉아 있는 모습만으로도 기품과 위엄이 서려 있었다. 가만히 계시다가도 도자기의 이야기가 나오면 나직나직 본인의 외길 인생과 도자기에 혼이 담긴 이야기를 펼쳐 보였다.


  고령토로 흙탕물을 걸러 하룻밤을 재우고 앙금을 걷어내어 수분은 없앤 후에야 자기를 만드는 재료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또 나무판으로 제작된 물레를 발로 돌리며 잘 반죽된 흙으로 자기의 모형을 만들어 그늘에 말려 약간 굳힌 다음에 칼로 다듬고 백토나 황토를 집어 넣어 색깔을 입혔다. 


  초벌구이를 900도에서 하고 재벌구이를 1,200도에서 48시간 불의 길을 열어줘야 진사의 자기가 나올 수 있다고 한다. 48시간 동안 화염의 출렁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불꽃이 튀지는 않는지 너무 새빨간 산화염은 아닌지 지쳐 쓰러지도록 저 빛깔 속에 융화되어야 하늘의 색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도자기를 굽는 데는 소나무를 떼요. 등걸을 다 벗긴 소나무를. 그래야 불똥이 튀지 않고 그윽하게 구울 수 있어요. 일반인들은 도자기가 비싸다고 하지만 어떤 날은 1,000 개의 사발을 구워도 그중 쓸만한 사발 하나도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어요."


  전시되어 있는 도자기를 찬찬히 훑어보던 일행 중의 한 명이 멀찍이 있는 도자기를 가리키며 저 진사 도자기는 얼마나 하냐고 나지막이 물었다. 흥정하는 이는 대학 교수였다. 혼을 담은 예술품을 가지고 흥정을 한다는 것이 겸연쩍어 보였지만 가격협상이나 혹은 절충교역이 아닐까 하고 애써 나는 정당성을 부여했다. 


  도공은 짐짓 도자기를 보더니 간단하고 명료하게 삼백만 원이라고 화답했다. 도자기는 수천만 원짜리도 있었지만 흥정이 된 그 도자기는 가장 작은 도자기였다. 교수는 물어물어 힘들게 발품을 팔아 왔다면서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이 무슨 돈이 있겠냐고 좀 더 깎아달라고 했지만 도공은 내성의 고집을 단단히 물고 있는 듯 보였다.   


  일어나면서 또다시 차비라도 빼 달라면서 교수가 사정조로 말 꺼냈다. 하지만 도공은 단호했다. 이미 그한테는 더 이상 에누리할 수 없다는 선을 분명하게 그어놓고 있었다. 옆에 있던 기자가 도자기를 사기 위해 직접 대전에 왔다면서 그냥 가면  얼마나 서운하겠냐고 깎아줄 수 없으면 저 다기라도 하나 끼워달라고 거들었다.  


  도공은 어디에서도 그 가격에 샀다고는 이야기하지 말라며 결국 수락했다. 현금 20만 원을 주고 내일 30만 원, 그리고 매월 50만 원 입금을 하겠다고 하자 아무렇치 않은 듯 그러라고 했다. 도자기 값을 떼먹으면 어떻게 하려고 하나며 내가 옆에서 너스레를 떨었다. 도공은 도자기를 사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내 말에 대해 일축했다. 


  돌아오는 길에 많은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원나라에 조공으로 바쳐졌던 고려의 도공들, 또 일본에 의해 숱하게 약탈되었던 도기와 도공들, 우리 선조들은 도공의 집안을 상놈의 집안으로 천대했다. 도공을 부르는 이름도 늙은이 거나 무슨 무슨 노인이었다. 결국 고려자기 기법은 사라졌고 지금의 세계사는 진귀품 중에 고려의 청자를 최고로 손꼽고 있다. 


  오수를 담아두면 자연정화되고 밥을 담아 두면 스스로 숨을 쉬기 때문에 찰기가 오래간다는 자기. 액운을 몰아내고 악귀를 쫓아내기에 양반집 문갑 위에는 하나씩 진열되었던 자기. 정작 자기가 악귀를 쫓아낼 거라고 믿지는 않아도 세계에서 인정하는 우리나라 도자기 기술만큼은 영원히 계승 전통되기를 염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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