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모니카 강사시험, 그 좌절과 합격

하모니카 도전기

by 몽돌돌



2014년, 내가 하모니카 강사 자격증에 도전한 것은 우연히 86세의 건강한 할머니가 EBS 장수프로에 출연한 모습을 시청한 이후였다. 방송에 나온 그 할머니는 피부가 고왔고 허리를 곧추세워 산길을 휘적휘적 내려오는 뒤태는 영락없이 40대였다. 그 할머니의 건강비결이 바로 하모니카였다.


하모니카 강사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하여 매주 수요일마다 청량리 근방인 동묘역에 있는 하모꿈동산 학원을 갔다. 처음 개인 수업 받은 곡은 동요인 '작은 별'이었다. 이 곡을 달포 하고도 열흘을 더 배웠다. 베이스와 분산화음이 들어가다 보니까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개인수업을 받고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해 인사동을 순례하는 일은 즐거웠다. 그 당시 우리 집은 대전이었고 근무지는 서울이었기에 하모니카 수업을 받는 날은 저녁을 먹고 인사동에서 숙박을 해야만 했다. 자주 가는 단골식당이 몇 군데 있었다.


첫 번째는 콩나물밥에 간장을 넣어 비벼 먹는 집이었다. 그 집은 가성비가 좋았다. 두 번째는 손두부집이었다. 손두부를 직접 만들었고 반찬이 어머니의 햇반찬처럼 정갈하게 나왔다. 그리고 소주가 당기는 날은 쪽갈비집에 갔다.


숯불에 구운 쪽갈비는 달큰한 맛이 일품이었고 숯불 향이 그윽하게 배어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집은 1인분을 팔지 않았다. 갈 때마다 사장님은 1인분은 안 된다고 했고 나는 이 집의 쪽갈비가 대한민국에서 제일 맛있다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면 사장님은 마지못해 들어오라고 했다.


쪽갈비집에서 혼자 소주 한 병을 기울이는 날은 인생이 젖은 손수건처럼 슬퍼 보이기도 했고 세상이 몸살 나게 아름다워 보이기도 했다. 이차는 야외테이블이 있는 인사동 호프집에 갔다. 노가리 한 마리 안주를 이천 원에 파는 저렴한 집이었다.


호프집에 도착할 때면 나는 기분 좋을 정도로 맑게 취해 있었다. 야외 테이블에 앉아 얼기설기 비치는 인사동 야경을 멀거니 바라보며 술이 내게 용해되는 것을 즐겼다. 사위에는 테이블 간 간격이 좁아 주변의 이야기가 왁자하게 깔렸다.


나는 호프집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을 좋아했다. 어쩌면 호프집을 찾는 사람들은 저마다가 전지적 작가 시점의 한 편의 소설을 쓴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이는 고단했던 직장의 애환을 호프잔에 담아 비극의 소설로 풀어내고 있었고 어떤 이는 애틋한 연모를 달달한 안주에 담아 희극의 소설로 연재하고 있었다.


호프 두 잔을 마시면 게슴츠레 취해 눈이 퀭 해졌다. 그러면 호프집을 나와 인사동 추레한 뒷골목 여관으로 들어간다. 여관은 낡았어도 내부는 인테리어 새로 해 소담하면서 정갈했다. 뭐니 뭐니 해도 3년 단골손님이다 보니까 숙박비를 많이 깎아주었다.




하모니카를 배운 지 2년이 되어갈 무렵, 원장선생님은 몇 달 후에 있는 하모니카 시험에 도전해 보라고 했다. 사실 하반기에 도전할 예정이었다. 당시 세월호가 터지면서 야근을 밥먹듯이 해야만 했고 2년 넘게 대전에서 서울까지의 출퇴근은 나를 지치게 했다. 하모니카 수업이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는 연역적 이유다.


자신이 없다는 말에 원장 선생님은 실기는 과거부터 하모니카를 연주했으니까 가능할 것 같다며 필기시험만 열심히 하면 충분히 합격할 수 있을 것이라 했다. 대신 필기시험이 난이도가 있으니까 공부를 열심히 해야 될 것이라는 말도 놓치지 않았다.


원장님의 시험 권유는 나를 달뜨게 했다. 내친김이었다. 나는 호기롭게 도전해 보기로 마음을 잡았다. 하지만 필기시험을 보고 나오는 내 얼굴은 그늘져 있었다. 불안한 그늘이 엄습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불안은 늘 비껴가지 않는다. 결국 나는 그 시험에서 보기 좋게 낙방했다. 나는 실기시험까지 가지도 못하고 필기시험에서 고배를 마신 것이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직장생활로 인한 연습 부족이었다. 필기시험 교재는 사단법인 하모니카협회에서 5권을 권장하는데 나는 한 권을 구입했고 그것마저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 필기시험 수업조차 시간이 없어서 들을 수 없었으므로 어쩌면 패배는 이미 예견된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다시 신들메를 고쳐 메고 그해 하반기 강사시험에 도전해야만 했다. 그 무렵 나는 전국시낭송대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시낭송대회가 끝났을 때는 한 달여 정도밖에 시험 준비할 시간이 남아 있지 않았다. 자못 비장하게 공부했다. 하지만 카랑카랑한 새벽에 눈을 뜨면 하모니카 강사시험이 수포로 돌아갈 것만 같은 불길한 기운이 감돌고는 했다.




그해 2016년 10월, 마침내 나는 두 번째 시험을 보았다. 필기시험을 보고 나오는 순간 이번에는 합격할 것 같다는 기운이 넘쳤다. 함께 시험본 수험생 5명과 점심을 먹었다. 그중 두 분은 이미 평생교육원과 강습센터에서 하모니카 수업을 하고 있는 강사분이었다. 한분은 사단법인 대한하모니카협회 시험이 다들 어렵다고 하는데 얼마나 어려운지 도전해 보고 싶었고 다른 한분은 제대로 된 강사 자격증을 따고 싶어서 응시하게 되었다고 했다.


두 시간이 지났을 때 하모니카 필기시험 결과 문자가 왔다. 거기에 내 이름도 있었다. 나는 뛸 듯이 기뻤다. 고진감래라는 말까지는 필요 없겠지만 시간이 부족하고 음악이론이 부재한 내게 필기시험 준비하는 과정이 결코 녹록지 않았기에 기쁨은 배가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실기시험이다. 어느 정도 자신감도 있었다. 당일 2시 20분부터 실기시험이 시작되었다. 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고 공무원 면접도 여러 번 보았지만 면접관이 아닌 면접생의 입장은 온몸을 전율시켰고 긴장감을 몰고 왔다.


면접위원은 응시원서를 보더니 하모동산에서 2년간 하모니카를 배웠는데 누구한테 사사받았냐고 물었다. 나는 하모동산 보람 원장님한테 배웠다고 했다. 면접위원은 자유곡인 '추억'을 연주해 보라고 했다. 연주하는 동안 긴장한 탓에 실수가 많이 나왔다.


면접위원은 악보를 보지 않고 분산화음을 넣어 연주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한 500번 정도 연습을 했냐고 내게 물었다. 사실 1000번도 연습을 더했었다. 또 면접위원은 하모니카 강사 자격증이 왜 필요한지, 지금 하는 일은 무엇인지, 또 앞으로 하모니카 협회활동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 묻기도 했다.


진인사대천명까지는 아니더라도 하모니카는 이제 결과만 기다리면 된다. 설령 실기에서 불합격한다고 해도 필기를 합격했기에 다음에 실기시험 볼 기회가 주어진다. 부담이 덜 하다. 만약 떨어지더라도 그것은 더 많은 연습할 수 있는 기회를 내게 제공할 것이다.


한 달이 지났을 무렵, 하모니카 최종시험에 합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내 인생에 하나의 자격증이 추가되는 순간이다. 드디어 하모니카 강사가 된 것이다. 합격의 낭보는 내 가슴을 뜨거운 강물이 흐르게 했다. 향후 하모니카 강사 자격증은 내게 여러모로 쓰일 데가 많이 있을 것이다.


지금은 공직에 있다 보니 외부에서 하모니가 강의 겸직을 할 수 없다. 하지만 직장에서 강의시간에 신명 나게 하모니카를 연주할 수도 있고, 재능기부로 봉사활동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퇴직 후에는 하모니카 강사로 활동하는 내 인생의 또 다른 분기점이 될 것이다.


가끔씩 직장에서 강의를 하다 보면 오후 수업은 늘 나른하다. 수강생의 얼굴에도 졸음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이때 하모니카는 졸음을 퇴치하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나는 하모니카 가방을 꺼내 수강생에게 이것이 무엇이냐고 묻고는 한다. 가방 안에는 하모니카 열 개가 다소곳이 들어있다.


수강생은 10개의 하모니카를 보고 놀란다. 하지만 그것은 약과다. 하모니카 세 개를 손에 들고 속주곡인 '이별의 부산 정거장'을 베이스에 분산화음까지 넣어 연주할 때면 어느새 강의실은 금세 피어난 낮달맞이꽃처럼 술렁이며 화사하다.


51235c3da3bcb7363b9ed833d7256dcb86eee2d4.jpg '이별의 부산 정거장' 하모니카 숫자보


다음 주부터는 근무시간이 끝나고 학교 직원을 대상으로 하모니카 수업을 하기로 했다. 비록 재능기부이고 수강생은 3명밖에 되지 되지 않지만 그 강의는 나를 더 성장시키는 배경으로 작용을 할 것이라는 것을 나는 이미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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