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세천공술과 줄기세포 무릎수술 후기
1. 들어가면서
5년 전, 미세천공술 무릎 수술을 하면서 대학병원 교수님한테 줄기세포 수술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다. 그 당시 교수님은 검증되지 않은 의료수술이라며 절대 하지 말라고 했다. 의료를 볼모로 하는 의료 상술이라는 이야기까지 했다.
그런데 요즘 방송 장면과 줄기세포 병원 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줄기세포 수술이 마치 이십 대 무릎을 돌려주어 테니스와 축구도 가능하다는 장밋빛 광고를 하고 있다. 그럴듯한 실례도 많이 들어놓고 있었다. 수술을 앞둔 무릎환자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나는, 내가 경험한 미세천공술 무릎수술과 줄기세포 무릎수술을 공개하여 수술을 앞둔 환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나는 이 십 년 가까이 운동에 중독이 되어 살아왔다. 배드민턴과 마라톤, 테니스... 내가 즐겼던 대부분의 운동이 무릎에 무리를 필요로 하는 격한 운동이었다.
마라톤은 고통의 레이스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고통의 레이스를 펼칠까. 바로 고통 뒤에 쾌통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고통을 참고 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쾌통이 찾아온다.
마라톤에 빠져 있었을 때 '말아톤'의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자폐아의 아들이 마라톤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엄마는 음주운전으로 사회 봉사 활동을 받게 된 마라토너에게 아들을 훈련시켜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자 그 마라토너는 이런 말을 한다.
- 당신이 마라톤을 알아?, 마라톤은 달리다가 심장이 타 들어가 죽는 것이 마라톤이야. 그런데 왜 정상적이 애도 아닌데 마라톤을 시키려고 하냐고...
나는 이 말에 엄마가 무슨 말로 응수할지 자못 궁금했다. 마땅한 논리도 없었고 댓거리도 못할 것 같았다. 그런데 엄마의 대답은 의외였다.
- 그러니까 당신이 가르치라고...
배드민턴도 몸에 무리가 가기는 마찬가지다. 그 운동에 중독된 동호회원이라면 누구나 무릎, 발목, 어깨 중 한 곳은 수술이나 가료를 요하는 환자다. 오죽하면 어느 클럽의 가입조건 중의 하나가 신체보험일까.
나는 미친 듯이 배드민턴의 스매시와 푸시, 하이 클리어와 같은 현란한 기교에 빠져 10여 년을 보냈다.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차라리 배드민턴을 아니 배운 것이 낫다는 생각마저 든다. 왜냐하면 배드민턴 중독은 결국 평생 사용해야 해야 할 내 무릎을 앗아갔기 때문이다.
배드민턴을 경기를 하다가 무릎을 크게 다친 것은 몇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전에도 운동을 하면서 어깨와 허리, 무릎 등 안 아픈 곳이 없었다. 다만 중독이 통증을 앞질러 갈 수 있어서 인내하면서 그 운동을 즐겼을 뿐이다.
그런데 몇 년 전 대전생활체육배드민턴 대회에서 상대방의 하이클리어를 받기 위해 뒤로 스텝을 밟다가 그만 하중이 옆으로 쏠리면서 무릎인대가 파열되고 말았다. 당시 파트너에게 미안해서 다쳤다는 소리도 할 수 없었다.
아픈 무릎을 이끌고 경기를 해야만 했다. 사실 걷는 것도 버거웠다. 상대팀은 어떻게 알았을까. 내가 절뚝이는 것을 알아채고는 내게 집중적인 포화를 가했다. 그때마다 내 무릎은 회복불능 상태로 손상되어 되어 가고 있었다.
그 후로 배드민턴 한 게임이라도 하면 일주일 이상 무릎이 쑤셨고 계단을 내려갈 때는 관절끼리 서로가 부딪쳐 탁탁 소리가 나며 통증을 유발했다. 시간도 없었고 수술은 가슴을 서늘하게 해서 버티고 버티다가 무릎에 메스를 들이대게 된 것이다.
2. 첫 번째 관절염 무릎 수술 - 미세천공술
수술 날짜: 2018. 9. 19
달리고 싶었다. 그런데 무릎 통증으로 달릴 수 없다는 것이 애달프게 했다. 계단을 내려갈 때 무릎에서 쇳소리가 났다. 고통을 동반했다. 결구 대학병원에 가서 MRI를 찍었다. 의사는 이 무릎으로 어떻게 버텼냐고 뜨악하게 쳐다봤다.
진단 결과 반원상 연골이 심하게 손상되어 당장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방법은 튀어나온 반원상 연골 일부를 절제하고 연골 재생을 위해 미세 천공술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 수술은 뼈에 물리적으로 미세한 천공을 하여 그 부분에서 연골이 새어 나오도록 유도하는 방법이다.
수술하기 전날, 잠은 쉬이 오지 않았다. 의사 선생님의 진단이 기억의 골짜기를 지나갔다. '교수님, 수술하면 축구나 배드민턴 운동은 할 수 있을까요?' 내가 물었을 때 '이제 나이 생각하셔야지요.' 사무적으로 말을 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이리 처절한 일이구나. 세월 속에 괴어있는 낯선 슬픔이 나를 젖게 했다.
수술하기 하루 전 날 저녁 6시에 입원을 했다. 의사 선생님은 사전에 채혈과 소변검사를 끝내서 특별히 할 일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밤 9시에 링거를 꽂더니 12가 되어서 엑스레이를 찍어야 된다고 나를 엑스레이 촬영실로 데려갔다.
내 몸에 링거를 꽂아 놓은 후로는 흡사 나는 한 마리 순한 강아지였다. 정작 환자처럼 몽환 해져 같다. 엑스레이를 찍기 위해 침대에 오르는데 자꾸 헛발을 짚기도 하고 침대에 올라가는 것도 위태위태했다. 자세를 고쳐 잡는 것도 쉽지 않았다.
엑스레이를 찍고 병실에 들어오자 사위는 소등되어 어두웠고 적요가 괴어 있었다. 잠은 오지 않았다. 복개하는 큰 수술도 아니고 무릎에 1센티 크기의 세 개의 구멍을 뚫는 시술이라고 애써 자위했지만 6주를 목발에 의지하면서 살아갈 생각과 앞으로 내가 좋아하는 운동을 할 수 없다는 고뇌가 나를 음울에 함몰시켰다.
날이 밝았다. 가뜩이나 수술하는 날에 날씨까지 찌뿌듯했다. 평일 같으면 이런 날은 커피부터 생각났을 것이다. 회진 온 교수는 10시에 수술을 시작할 것이며 수술시간은 30분 정도지만 준비하는 시간, 마취하는 시간, 회복시간을 포함하면 세 시간 정도 소요될 것이라 말을 했다.
09시 50분경, 수술대 침대에 올랐다. 병원 직원은 나를 포함한 두 명의 수술환자의 침대를 끌고 수술실로 이동했다. 동병상련과 측은지심을 느껴도 좋으련만 불현듯 다른 환자와 내가 뒤바뀌어서 엉뚱한 곳을 수술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내 수술할 다리는 오른쪽 다리인데 멀쩡한 왼쪽다리를 절개한다면, 혹은 아랫배를 절개한다면... 아마 의료 사고 방송을 많이 본 영향일 게다.
수술실로 들어가자 의사는 옆으로 누워서 몸을 웅크리고 태아처럼 배꼽이 보이도록 몸을 동그랗게 말라고 했다. 내가 자세를 취하자 주사를 놓았다. 따끔했다. 의사는 하반신 마취가 아프지 않도록 등골에 먼저 놓는 국소마취 주사라고 했다.
내 앞에는 솜털 보송보송한 간호사가 모로 누운 나를 한 손으로는 내 머리와 다른 한 손으로 내 다리를 서로 감싸 동그랗게 안고 있었다. 내가 움찔하려 하자 간호사는 움직이면 안 된다고 나를 당겨서 그녀의 가슴의 융기 쪽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녀도 간호 경험이 없었을까. 그녀의 가슴에서 두근거리는 박동소리가 전이되어 왔다.
국소 마취제를 엉덩이에 맞는 것은 참을만했다. 그러나 등골에 놓는 마취 주사는 다시 맞고 싶지 않다. 뭉근하고도 싸한 액체가 등골을 지나 대퇴골을 흘러가는 느낌이 고스란히 전달됐다. 의사는 한 방으로 부족했는지 몇 방의 주사를 등골에 더 넣었다.
간호사는 수술하는 동안 수면을 유도한다며 입에 원형 마스크를 씌웠다. 그러나 긴장한 탓일까. 쉬이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비몽사몽간에 ‘의사 선생님, 잠이 안 와요’하자 옆에 있던 간호사가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까무룩 잠이 들었다.
수술을 마치고 ‘일어나세요.’ 간호사의 팔을 흔드는 소리에 선득 깨어났다. 내가 깨어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수술한 무릎에 힘을 주어 느낌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내 무릎인지 타인의 무릎인지 감이 없었다. 문득 다리 잘린 환자가 이런 느낌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리에 힘을 주어도 마취가 풀리지 않아 고통을 느낄 수도 없었고 무릎까지 그 어떤 것도 하달할 수 없었다.
수면제가 과했을까. 병실에 와서도 자꾸 졸음이 쏟아졌다. 간호사는 자서는 안 된다고 했지만 한 시간 정도 사경을 헤매었다. 교수님이 들어오셨다. 교수님은 ‘많이 아프시나요? 최선을 다했습니다. 깨끗하게 절제했고 시술도 잘 되었습니다.’ 말을 했다.
설마 저 연로한 교수님이 거짓말을 하지는 않겠지. 그런데 교수님으로서 시술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굳이 최선을 다했다고 얘기할 필요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네 교수님,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 하며 감사함을 전했다.
마취한 하반신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수술이 끝난 후 네 시간 후에 간호사가 왔다. 내 발을 만지면서 느껴지냐고 했다. 내가 감이 없다고 하자. 간호사는 이상하다며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흔들더니 좀 더 기다려보라며 병실을 나갔다.
오후 5시가 넘어서일까. 서서히 왼쪽 다리부터 마취가 풀렸다. 간호사의 살짝 닿는 손길이 발가락에 전이되어 왔다. 그 후 저녁 7시에 드디어 오른 발도 느낌이 왔다. 저녁 7시가 되고 마취가 풀린 후에야 내 무릎 아래에 높이를 지지해 주는 제법 높은 쿠션이 깔려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간호사는 통증이 있으면 얘기하라고 했다. 생살을 찢고 뼈에 구멍을 뚫어놓았으니 어떻게 통증이 없겠는가. 아프다고 한다면 간호사가 조치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기껏해야 링거에 진통제 주사를 놓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있을까. 다행히 감내할 수 있는 통증이었다.
그날,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수술한 통증을 참아내는 것보다도 옆 배드에서 끙끙 앓아 죽어가는 소리가 자꾸 귀를 후볐다. 또 바로 옆 오토바이 사고로 입원한 환자는 밤을 새워서 몸을 뒤척이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했다.
오토바이 사고는 그의 안면부 이빨을 함몰시켰고 발바닥의 뼈마저도 가루를 만들어 놓았다. 그보다도 내가 보기에는 알츠하이머 같은 기억력 상실이 더 커 보였다.
‘아니, 이 사람이 오줌 호수를 또 빼면 어떡해’ 간병인은 화를 냈고 간호사를 불렀다. 환자는 연신 핸드폰을 달라고 했다. 간병인은 핸드폰을 딸이 가져갔다고 했고 그러면 딸한테 전화를 해보라고 했다. 계속 이 레퍼토리는 튀는 디스크처럼 새벽 여명이 밝아올 때까지 되돌리기를 반복했다.
다음 날, 점심 무렵 오토바이 사고 환자의 아들과 딸이 와서 다른 병원으로 옮긴다면서 데려갔다. 57세의 아직 한창인 나이의 오토바이 사고. 만약 영원히 정신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어떡할까. 그 나이에 정신줄을 놓고 사는 것은 너무 안타깝지 않을까. 사위의 기운이 떨어지고 있었다.
또, 건너편의 환자는 어깨가 심줄이 파열된 환자였다. 그런데 어깨가 파열된 사연을 들어보니까 낙지 잡기에 미쳐 삽질하다가 다쳤다고 했다. 속으로 실소를 했다. 정작, 나 같이 미련한 사람이다. 배드민턴 무리하게 치다가 무릎 연골이 손상된 나 같은 사람이나, 낙지 한 마리 더 잡겠다고 어깨의 심줄이 파열된 그 사람이나 무엇이 다를까.
수술한 다음날부터 통증은 어느 정도 사위어 갔다. 의사는 무릎운동기구를 가지고 처음에는 60에 맞춰서 30분 운동을 하라고 했다. 수술이 잘 돼서였을까. 80 각도에 놓고 30분을 운동해도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3박 4일을 입원하고 퇴원하는 날, 간호사는 내 팔뚝의 링거를 뽑았다. 살 것 같았다. 하지만 목발을 짚고 이동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팔목이 쑤셔왔다. 집에 와서는 방과 거실과 화장실에 고정식 의자를 깔아놓고 바퀴가 달린 회전의자를 이용하여 타잔이 밧줄을 타듯 앉은 자세로 이동하여 일을 보고 있다.
수술한 지 5일이 지났다. 종아리가 뭉근하고 무리하게 재활운동을 했는지 수술한 부분에 약간의 쓰라림이 동반되고 있다. 병가는 6주를 냈다. 앞으로 남은 5주, 재활하면서 나 자신을 뒤돌아보는 명상의 시간을 갖고 싶다.
3. 두 번째 무릎수술 : 관절염 줄기세포 카티스템 수술
수술날짜: 2021. 2. 3
내가 대학병원에서 미세천공술 무릎수술받은 것은 2년 전이었다. 무릎수술이 완치될 것이라고 득의에 차 있었다. 하여, 나는 다시 배드민턴장으로 달려가 현란한 스매시로 적진을 교란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장춘몽이었다. 미세천공술 무릎 수술 결과는 좋지 않았다. 수술한 지 2년이 지났건만 계단을 오르거나 내려올 때마다 오래된 마룻바닥의 거닐 때의 서걱대는 소리가 났고 심한 통증을 유발했다. 또 무릎에서의 뭉근함과 둔중함은 수술 실패를 애써 확인사살하고 있었다.
내가 미세천공술 무릎수술에 실패한 연유는 무엇이었을까. 이십 년 이상의 과격한 배드민턴 운동은 폭탄 맞은 것처럼 내 무릎의 연골을 엉망진창으로 터트려 놓았다. 또한 그것을 극복하기에는 오십이라는 나이가 받침을 해주지 않았다. 두 번째는 재활의 실패였다. 수술하고 3개월이 지났을 때 근무했던 기관이 다른 지역으로 이전을 하면서 나는 2,200억 이상이 투입된 30개 동이 넘어가는 각 건물에 대한 준공검사를 책임져야만 했다.
미세천공술은 관리가 중요했다. 수술 후 최소 3개월 정도는 걷는 것도 절제해야 했다. 조금이라도 무릎에 하중이 걸리면 나오려고 하던 새 연골이 안으로 다시 들어간다며 교수님은 조심하고 또 조심하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무수한 건물 계단을 오르내려야만 했다. 결국 연골이 나오려고 하다가 다시 들어가고 만 것이다.
내가 처음 미세천공수술할 때는 신명 나게 배드민턴은 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등산이라도 마음 편히 하고 싶었다. 하지만 미세천공술 수술하고 3시간 이상 등산한 적은 없었다. 계단을 내려갈 때의 통증이 부담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나의 미세천공술 수술은 실패한 셈이다.
그러다가 우연히 월드컵의 영웅 히딩크 감독이 방송에 출연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평생 관절염으로 고생하며 절뚝였던 그가 줄기세포 무릎수술을 받고 다시 축구와 테니스를 즐긴다는 내용이었다. 충격이었다. 그 장면을 보는 순간 내 심장은 심하게 박동 쳤다.
히딩크 감독이 수술한 강남의 줄기세포 전문 병원을 찾아갔다. 병원 접수실에는 장성우 씨름선수 사진이 대문짝만 하게 걸려 있었다. 그는 씨름 시합 중 무릎파열로 선수생활을 접을 위기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이 병원에서 줄기세포 수술을 한 후 완쾌되어 두 번의 씨름장사 타이틀을 거머쥐었다는 것이다.
원장님과 상담을 했다. 젊으신 분이었다. 원장님은 과거에 미세천공술을 했어도 줄기세포 수술이 가능하다고 했다. 또, 배드민턴을 다시 치고 싶냐고 내게 물었다. 내가 고개를 주억이자 충분히 가능하다고 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수술 후 1년이 지나고 재활을 통해 근력이 제대로 돌아와야만 가능하다는 설명도 놓치지 않았다.
카티스템인 줄기세포는 고가였다. 주사약 만한 크기의 한 병에 천팔백만 원이이었다. 두 병은 삼천만 원의 수술비용이 든다고 했다. 나 같은 경우는 손상부위가 커서 두 병이 들어갈 것 같다고 했다. 보험 적용은 되지 않았다. 다행히 나는 실손보험 있어서 치료비는 해결되었다.
2021년 2월 3일. 마침내 강남병원에서 줄기세포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늘 두려움을 동반했다. 새우처럼 몸을 웅크리고 척추에 하반신 마취제를 놓았고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링거를 맞고 있었다. 몸에는 소변줄이 꽂혀 있었다.
수술 후 통증의 연속이었다. 누웠다가 일어날 때는 현기증이 일어나 혼미했다. 심지어 먹은 것도 없는데 헛구역질에 토하기까지 했다. 나는 한 마리 순한 양이 되었다. 삼일이 지난 후에야 링거와 소변줄을 떼었다. 살 것 같았다. 나는 고통의 부피만큼 가벼워지고 있었다.
수술을 하고 5주간 치료를 받다가 퇴원을 했다. 병원에서 혼자 목발을 짚고 전남 고흥까지 까지 왔다. 남은 것은 재활과 근력운동이다. 사무실 출근까지는 일주일이 남아있었다. 모처럼의 병가를 재활과 근력운동을 열심히 하면서 나는 고흥에서 봄을 설매화처럼 싱싱하게 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4. 줄기세포 무릎수술 2년 5개월 경과 후기
줄기세포인 카티스템은 태아의 탯줄에서 중간엽 세로를 채취해서 연골세포로 만든다. 줄기세포 수술이 도입한 지는 1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의사들 간에도 찬반론이 팽팽하게 대립한다. 그래서 환자들은 줄기세포 수술에 대해 의구심으로 두려움, 그로 인한 혼란스러움을 갖고 있다.
줄기세포 무릎수술 하고 1년이 경과되었지만 내 무릎은 호전되지 않았다. 오히려 수술하기 전보다 무릎통증이 더 심했다. 결국 나는 무릎수술하고 1년 6개월이 지난, 그러니까 작년 8월, 수술 집도한 병원 원장님한테 무릎수술 경과를 확인받으러 갔다.
나는 무릎이 호전되지 않아 우울증마저 찾아왔다며 절망을 곱씹었다. 원장님은 눈을 홉뜨더니 양손으로 내 허벅지를 번갈아 만져봤다. 그리고 수술한 오른쪽 무릎의 허벅지가 왼쪽 무릎의 반쪽밖에 되지 않는다고 격앙되어 내게 말했다. 이렇게 근력운동을 하나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계단을 내려올 수 있냐고 역정을 내셨다.
사실 내가 봐도 근력운동을 하지 않아 허벅지 차이가 너무 컸다. 근력운동의 필요성은 알고 있었지만 사실 게으른 것도 있었고 근력 운동 시 무릎의 약간의 통증이 있어서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원장선생님은 MRI 사진을 보면서 다행히 연골 생성이 잘 되었다고 했다. 근력운동만이 살길 이라며 당부하고 또 당부했다.
원장 선생님은 실내 사이클, 수영, 그리고 모래주머니를 차고 의자에 앉다 다리 들어 올리기를 매일 꾸준히 하라고 그래야만 다시 배드민턴을 칠 수 있다고 당부했다. 나는 원장선생님을 신뢰하기로 했다.
그 후 나는 최소 일주일에 4일, 하루 40분 이상 집에서 온몸이 흥건한 물주머니가 되도록 피나는 근력운동을 했다. 그렇게 6개월 지났다. 그때가 올 2월이었다. 무릎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계단도 내려가지 못해 절뚝였었는데 두세 시간 정도의 트레킹이 거뜬했다. 여수의 낭도섬을 4시간 30분 트레킹까지 소화했다. 계단 내려올 때 약간의 뭉근함이 있었지만 참을 만했다.
오늘 날짜로 수술한 지 2년 5개월이 지났다. 어제는 대중교통으로 대전에 갔다. 지하철을 제법 많은 계단을 내려가는데 절뚝일 필요가 없었다. 통증도 없었다. 아주 미미하게 느껴지는 무릎의 뭉근함 뿐이었다. 어지간히 가파른 언덕을 내려오는 데도 통증이 없었다. 그리고 부단한 근력운동은 5킬로의 체중감량도 득템으로 가져다주었다.
아직 아직 줄기세포에 대해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어느 줄기세포 무릎수술한 환자는 통증 없이 계단을 내려오기 위해서는 3년이라는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맞는 말인 것 같다. 수술한 지 2년 5개월이 지난 내 무릎은 아직 진화 중이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6개월이 지나면 나도 수술한 지 3년이다. 그때 만약 그 과격한 배드민턴 운동이 가능하다면 줄기세포 수술은 신이 내린 선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