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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돌돌 Jun 13. 2023

이십 년 후에 그녀를 만났다(상)

살아가는 이야기

내가 그녀를 이십 년이 지나 다시 만난 것은 정작 우연이었다. 지금도 그녀와의 대학 생활을 떠올려보면 아련하면서도 가뭇하다. 


그녀와 함께 떠났던 수원의 사도세자 능이며, 용주사 그 가을의 벤치, 또 안양 명학역의 윈도가 훤히 보이는 치킨집에서 생맥주를 마시며 도란도란 나누었던 문학과 인생 이야기는 가슴 한편에 맑은 수채화처럼 걸려 있다.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세월이 흘렀다 해도 설렘을 동반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특히 추억의 뒤편에 켜켜이 쌓여있는 그리움의 뒤안길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것은 잊히지 않는 사람 가슴속의 진한 추억이 어떤 울림이나 떨림으로 자리하기 때문이다.


대학 다닐 때 그녀와 나는 문학동아리에서 활동했다. 그렇다고 같은 동아리는 아니었다. 나는 수필문학회였고 그녀는 그녀는 시문학회였다. 어쩌면 학과와 동아리가 다르기 때문에 그녀와의 만남은 허허로운 바람 스쳐 지나갔을 수도 있었다.  온전히 그녀를 만날 수 있었던 배경은 내 친구가 그녀와 같은 학과였기 때문이었다. 


학교 도서관에서 내 친구를 통해 자연스럽게 그녀를 알게 되었다. 그녀는 날씬했다기보다는 큰 키에 바람만 불어도 스러질 것 같은 가냘픈 몸매였고 기쁨으로 충만되어 있기보다는 어딘지 모르는 깊은 우수와 비감이 웅숭이고 있었다. 그녀는 늘 차분한 어조로 나지막이 대화를 이끌어 나가고는 했었다.  


그러니까 내가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은 대학을 졸업한 지 어느덧 이십 년이 지난 뒤였다. 그 당시에는 싸이월드나 아이러브스쿨이 한창 인기가 있던 시절이었다. 우연찮게 미니홈피에 들어갔을 때 그녀한테 쪽지가 도착해 있었다. 감응적으로 놀라 몇 줄 안 되는 글을 또박또박 읽어 내려갔다. 

- 혹시 제가 찾는 몽돌돌 씨가 맞는지 궁금합니다. 전 안숙자라고 합니다. 제가 찾는 몽돌돌 씨가 맞으면 아래 메일로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아, 대학을 졸업한 지 이십 년이 지났는데 정보화 발달은 참으로 신기하구나. 이렇게 대학 때의 친구를 다시 찾게 되는 기회의 장으로 작용하니 말이다. 나는 잊혀져 가는 대학 때의 기억을 하나둘씩 떠올려서 유리알처럼 맑게 닦아 보았다. 


대학 1학년 때의 시화첩, 직접 그리고 파스텔로 색칠하고  또 글을 써서 한권의 작품집을 만들었었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도서관에서였다. 그녀는 내 친구 옆에 나란히 앉아 중간고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날 도서관을 함께 나오면서 내가 연락처를 묻자 그녀는 메모지가 없다며 내 손바닥에다 연락처를 직접 적어 주었다. 


그녀는 시를 좋아했다. 그것은 그 당시 신춘문예에 관심이 있었던 나와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되었다. 그녀는 문학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했고 고궁 걷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내 하모니카 소리를 좋아했다. 수원 용주사를 둘이서 갔을 때 그녀는 아름드리 플라타너스 공원의 벤치에 앉아 떨어지는 낙엽을 멀거니 바라보며 말했다. '혹시 하모니카 안 가져왔니? 낙엽은 떨어지고... 네 하모니카 부는 소리가 이 계절에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사실 그날 내 남루한 잠바 안 주머니에는 하모니카가 감쳐줘 있었다. 그런데 왜 그녀한테 나는 옷 안에 있는 하모니에 대해 은닉했을까. 아마 그녀가 먼저 하모니카를 꺼내지 않았다면 석양이 물들고 낙엽이 떨어지는 용주사에서 어쩌면 내가 좋아하는 애니로우리를 구성지게 연주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그녀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대학 2학년 때였다.  그때 그녀는 전공했던 전산학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학과 수업에는 관심이 없었다. 강의마저 들어가지 않기 일쑤였다. 다른 친구들처럼 그렇다고 대리출석을 하지도 않았다. 그만큼 그녀의 학점은 쌍권총을 차고 있었지만 이상하게 거기에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그녀는 대학 1년을 마친 후 휴학하고 천안으로 낙향했다. 그리고 군입대하기 3일 전, 그녀는 내게 전화를 걸어 천안에 내려올 수 없냐며, 소개해 줄 사람이 있다고 했다. 내가 천안에 도착했을 때 천안역 탁 트인 광장에는 그녀와 그녀 친구가 서 있었다. 


그녀는 국문학과 다니는 친구라며 나와 맞는 부분이 많을 것 같아 소개해준다고 했다. 나는 당시 소개해줄 사람이 이성인 것도 모르고 있었다. 일순 당황했다. 서로가 인사를 건네고 통성명을 나눈 후 셋이서 태조산에 가게 되었다. 


지금은 승용차로 태조산 각원사까지 바로 올라갈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버스에서 내려 호수가 있는 언덕을 지나 한참을 걸어서 올라가야만 했다. 산길을 오르면서 내 이마에는 연신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그때마다 그녀는 친구 보는 앞에서 땀을 닦으라며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나는 손수건을 이성에게 건네준다는 것은 땀을 닦으라고 순수한 마음도 있지만 이성 간에 관심을 표하는 일련의 행위라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내게 다른 이성을 소개해 주고 또 땀을 닦으라며 이쁘게 수놓은 손수건을 연신 내게 건네주고 있었다. 나는 태연하게 손수건을 받아 이마를 닦았지만 그 기류는 미묘했다. 


각원사에 올라갔을 때 청동대불은 어마어마하게 컸다. 내가 신기해하자 국문학을 전공하는 그녀 친구는 국문과답게 논리 정연하게 설명했다. 우리나라는 과거부터 숱한 외세의 침입을 받다 보니까 필요 이상으로 최고 가치를 지향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각원사의 청동대불이며 이 역시도 크기로는 세상을 압도할 수는 있지만 예술성과 작품성은 인정받기 어렵다는 이야기였다. 가까이 가서 자세히 보니 불상의 이목구비는 마치 찰흙으로 성의 없이 덕지덕지 붙여놓은 것처럼 보였다.  


그것이 그녀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사실 그 후 그녀와의 마지막 이별이 슬픔으로 다가올 만큼 깊은 연정이 없었다. 학창 시절에 그녀와 이성적으로는 서로가 멀찍이 서있었기에 헤어지고 난 후에도 어떤 절연감 같은 것도 다가오지 않았던 것 같다.  


그녀한테 전화가 온 것은 내가 제대하고 복학하고 몇 개월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녀는 뜬금없이 시집갔다며 애까지 있다고 했다. 나는 출산은 국가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이고 애국자라며 축하한다고 했다. 남편은 무엇을 하냐고 묻자 그녀는 중소기업 사장이라면서 머지않아 아이의 돌이니까 꼭 와서 축하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녀의 아이 돌 잔치 하는 날, 허리에 찬 모토로라 삐삐에서 수없이 신호가 울렸다. 그녀였다. 발신자 번호 뒤에는 8282라는 긴 꼬리가 달려 있었다. 나는 끝내 그녀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다. 이미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고 사는 그녀한테 아무리 친구라고 하지만 돌잔치에 나타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제대 후 나는 대학 학과와 공무원 수험생활을 병행하고 있었기에 한가로이 그녀를 만날만큼 내 삶이 윤색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연락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차차로 그녀에 대한 기억도 사위어 갔다. 그런데 이십 년이 지나서 다시 그녀한테 연락이 온 것이다. 그녀와 일상적인 메일이 오고 갔다. 그리고 자연스레 크리스마스마스를 얼마 앞둔 어느 토요일 점심때 사당역에서 그녀와 만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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