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새파란 돌봄] 독후감
정의(定義)롭지 않은 돌봄의 정의(正義)
사람이 사람을 돌보는 데에 정의가 필요할까? 필요하다면 무엇을 위한 정의일까? 단순한 개념적 분할? 또는 지원을 위한 기준의 필요성? 그것도 아니면 나와 다른 것을 배척하고자 하는 차별을 위한 것인가.
새파란 돌봄은 읽는 내내 몸 속안의 무언가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제 막 사회에 첫발을 내딛은 청년들, 또는 청소년들과 같이, 돌봄을 받아야할 시절을 돌봐야할 의무로 가득 채우는 청춘들이었다. 이 모든 일이 정녕 어쩔 수 없기만 한 일들이었는지, 사회에 대한 불만을 끓게 만들었다. 어쩌면 그러한 처지에 놓인 자들에 대해 나를 대입해 본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이라면 모름지기 아시타비이니 말이다.
어린 이들의 돌봄이 마냥 불쌍하거나 잘못된 것으로 치부되길 바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 중에는 자기 가족에 대한 책임감, 또는 신념을 가지고 스스로 택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 그들은 환경에 내몰려 책임을 떠안는다. 자신이 무언가 판단하기도 전에, 혹시 고심해보기도 전에 외부의 물결에 휩쓸린다.
새파란 돌봄. 어린 이들이 돌봄의 시련, 파란 속에 휩쓸린 것이다. 이것이 정말 단순히 그들 삶의 운이라, 운명이니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칭해져야 마땅한 것인가?
자기 몸 하나 돌보기 고사하는 이들에게 돌봄은 가혹하다. 그런데도 어떻게든 평범한 삶을 살아내기 위해 자신을 지키고자 노력하였다. 그것이 자조 모임의 시작이자, 이 책의 발단이 되었다.
자신의 처지에 지치고, 토로하고 싶지만, 주변의 일상은 그렇지 않다. 자기 가족에게 손을 벌리는 것이 가능한 청소년들, 공부하고 노는 것이 일상인 대학생들 사이에서 자신의 일상을 온전히 가족에게 쏟아낸다. 이러한 인생의 어려움은 그들 세대 가운데에서는 당연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변과 쉽게 나누지 못하는 이들은 일상 속 외로움을 느낀다.
가족의 정의가 대가족, 핵가족, 이제는 1인 가구로 변화하며 그 범주가 넓어지듯이, 돌봄에 대해서도 그것이 진정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개념 되고 정의될 필요성은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그들이 정의되었다고 해서 그런 원치 않은 돌봄을 당연한 것으로 보고 그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것은 내가 꿈꾸는 정의로운 세상은 아닌 것 같다. 이러한 잘못된 책임이 왜 일어났고, 무엇이 원인이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정의의 시작이 진정한 정의의 실현이 아닐까 싶다.
사실 필자는 노인보호전문기관에 사회복지사로서 종사하고 있다. 필자의 역할 상, 필자는 학대 피해를 받은 돌봄이 필요한 노인에 대해 자녀들을 부양의무자로서 보고 그들에게 책임을 종용한다. 그들 중에는 부양 능력이 충분하지만, 하루아침에 자기 부모를 내치거나 학대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일부, 어쩌면 다수의 사람은 정말로 자기 몸을 건사하기 힘든 이들도 부지기수다. 또한 어릴 적 가정폭력으로 이별했던 부모가 자신을 맡기며 돌봄을 종용하여 이에 대해 심적 괴로움을 호소하는 가족들도 있다.
그러한 가족들을 볼 때마다 필자는 딜레마에 빠지곤 했다. 물론 자식의 도리로서 부양의무자의 책임은 필수 불가결 하나, 정말로 책임을 회피하는 이들과 책임을 지지 못하는 이들의 경계에 선 사각지대의 그들에게는 사회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책에서도 말하듯이 해결되지 않은 여러 법적 문제들과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자원들이 현저히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이 책은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를 지금의 현실과 다가올 미래에 대해 직면하게 만든다. 누구나 다 노인이 되고, 그것은 기실 나의 부모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른 이들의 일이 아니며 누구나 겪게 될 수 있는 파란이라고 책은 내내 외친다.
돌봄이 정의되지 않는 세상이 되길 바란다.
말에는 힘이 있듯이, 그 단어에는 뜻이 담긴다. 그러나 단순한 뜻뿐만 아니라, 그 단어로써 투영되는 누군가를 바라보고 사회의 시선도 함께 담길 것이다. 당장에 조손가족, 독거노인, 소년소녀가장의 단어들만 떠올려도 우리는 부유하고 행복한 가정보다는 도움이 필요한 또는 어려운 가정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자원은 모두 한정적이기에 그것의 배분을 조율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은 물리적인 시간은 걸리지 않는다. 우리 마음속에서 정의되는 그들과 거리가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의 온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