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카르타 거리에서 도(道)를 보다
난, 지금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한 가운데 택시 안에 있다.
일주일 출장 기간인데 일을 놀이처럼 다뤄보자는 내 신념 내 이번 기간 동안 유쾌한 관찰자의 입장에서 이곳을 들여다 볼 예정이다. 왜냐하면, 인생에서 다양한 감정들의 양태가 존재하지만 그 중 긍정적인 정서들의 역할은 분명 삶을 나은 방향으로 끌어가는 힘이 있다고 나는 믿고 앞으로도 그들에게 조금 더 맡겨 봐야겠다.
예를 들어, 모두가 곤히 잠들어 있을 시간인 새벽 4시30분, 나지막하지만 힘있게 시작되는 무슬림 사원의 기도소리, 이 상황은 새벽 잠귀가 밝은 사람에겐 악몽과 같은 일이다. 반면, 생경한 나라에서의 이색적인 체험을 유쾌하게 받아들일 태도가 있는 사람에겐 나쁘지 않은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 기도 소리는 묵직한 남자가 뿜어내는 저음이다. 공기와 공명한다는 느낌인데 공기의 고유진동수와 그 저음은 공진이 되는 듯 했고 난 증폭된 진동을 귀와 몸으로 느꼈다. 뭐라고 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 깊이는 심원하게 느껴졌다. 정신이 산만하거나 몸이 지쳤을 때 명상하며 이 기도소리를 듣는다면 심신의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 곳에서 그랩, 고젝 오토바이, 택시 운전자들은 예술가들이다. 좁은 도로와 신호등이 없는 곳곳에서 한 치의 여유만을 허용하며 접촉사고 없이 유유히 물 흐르듯 주행하는 그들을 관찰하고 있자니 노자의 “道”가 떠오른다. 그들은 연속된 관계 속에 있고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었다. 나에게는 감히 자카르타에서 운전하며 이런 예술가의 대열에 합류할 마음의 여유와 도량이 없다.
한편으로는 태양 아래 오토바이 운전자들의 얼굴에 서린 신산스러움을 떨쳐주고 싶다는 생각이 종종 들었다. 하지만 난 여기 자카르타에서 한참 동쪽으로 떨어진 나라에서 온 단지 관찰자일 뿐이고 누구나 각자의 삶은 있는거니까. 뭔 주제넘게.
여기 음식은 나에겐 나시고랭, 미고랭이 대표적이고 가장 맛나다. 예전엔 해외에선 호기롭게 길거리 음식을 선호하였지만 이젠 약간은 부담된다. 내 몸이 그만큼 받쳐주지 못하는 것 같다는 신호가 종종 오기도 하고. 2년 전 아프리카에 고작 1주일 여행 다녀온 이후 입 주위 포진과 설사 등은 그런 반증이 되는 것 같다.
출장 마지막날, 쇼핑몰 내 식당에서 먹은 이 음식은 담백하면서도 훌륭했다. 계란, 칩, 튀김, 카레 등이 풍부하게 버무려진 이 메뉴의 이름은 아쉽게도 기록하지 못했다. 여기에 사떼를 곁들이니 오늘이 출장 마지막 날이라는게 아쉬워진다.
첫째 날 아침, 일어난 후 바로 창문을 통해 바라본 자카르타 시내의 모습은 몽환적이었다. 아스라이 스며드는 아침 기운과 풍성한 나무로 둘러싸인 내 숙소는 인도네시아의 정취를 느끼기엔 이상적이었다. 이제 곧 태양이 올라오면 뜨거울 이 공간들. 하지만 지금은 상쾌하다구.
이 곳 화폐 가치는 약하다. 2년 전 이곳에 왔을 때 이런 적이 있었다. 출국을 위해 호텔서 택시를 타고 공항에 도착해 미터기에 찍힌 금액으로 택시비를 지급해야 하는데 이 곳 화폐는 루피아다. 우리나라 “원”의 1/10도 채 되지 않는 화폐가치를 지니고 있다. 난, 당연히 3~40분 이상을 달려온 상황을 내 방식대로 이해하고 미터기에 찍힌 30,000 루피아가 채 되지 않는 금액을 보고는 3만원 정도로 내 머릿속으로 정리해 버렸다. 그리고는 300,000 루피아를 꺼내 택시기사에게 건네고 나서는 “Keep the change”라고 해버렸으니.. 그 택시기사는 얼마나 당황하면서도 쾌재를 불렀을까. 내 착각을 인식하는 데는 택시가 떠나고 난 후 몇 분이 걸리지 않았다.
인도네시아의 근현대사는 제국주의 침탈의 역사다. 물론 인도네시아 내 독립적인 자주사관을 지닌 학자들은 끊임 없는 투쟁의 역사였다고 한다. 공감하고 바람직한 역사인식이라고 본다. 300년 이상 풍부한 자원을 수탈당했던 그들의 역사를 짐작하고 있자니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수탈된 대지”가 떠오른다. 이 책은 라틴아메리카의 수탈에 대한 잔인하고 질펀한 기록서이고 그 지역마다 상황은 다르겠지만 본질은 강자에 의한 약자 탈취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인도네시아를 지배했던 네덜란드인들은 초등학생들이 맘대로 운동장에서 뛰어놀지 못하게 학교의 운동장들을 아예 없앴다고 한다. 기초체력과 체격의 향상을 유년기부터 배제하도록 계획했다는 것인데, 인도네시아인들의 체격을 보면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닐 듯하다.
이번 외유기간 중 만난 한 인도네시아인은 한국에서 한 달 살기를 했다고 한다. 제주도였다고 하는데 인천으로 입국해서 비자 받기가 인도네시아인으로서는 까다롭다고 한다. 제주도는 상대적으로 비자취득이 용이하여 많은 인도네시아인들의 여행지가 된다고 하더라는.
이 사람을 한국으로 이끈 K-컬쳐는 주목할만 하다. 난 “X 세대” 일원으로서 이런 문화의 기반을 다진 X-세대 문화 첨병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베이비붐 및 386세대가 한국의 산업화, 민주화 형성에 큰 역할을 수행한 것은 인정하지만 한국 사회의 헤게모니를 독점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철승 교수는 이런 시스템적인 문제점을 한 권의 책으로 정교하게 정리했는데 바로 “불평등의 세계”다. 산업화 세대가 첫 삽을 뜨고 386세대가 완성한 한국형 위계구조라는 그 주제로 말이다. 한편, 이 위계구조에서 소외된 X-세대는 정치, 경제와는 다른 분야인 문화 분야로 눈을 돌려 새로운 생태계를 구축하고 그 성과물들을 세계로 수출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대한 분석은 김민희씨가 “다정한 개인주의자”라는 책에서 차분하고 설득력 있게 설명해낸다. 현재 국제적으로 한국의 문화적 위상은 높다. 아마 지금이 한국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지위일 수도 있겠다. 그러니 한국 사람들은 세계 곳곳을 부지런히 누비고 다닐 필요가 있고 다닐 만 하다는 거다. 각자들 할 일이 많을 것 같다.
일주일 정도의 짧은 출장을 마치고 돌아와 인도네시아를 추억하며 정리하는 지금. 지난 하루하루 내 동선이 의식의 흐름을 따라 자유롭게 자카르타 곳곳을 누비고 있다. 여기 서울서 까마득히 먼 거리지만 난 상상력을 발휘하여 다시 그곳의 풍경, 향기, 소리를 유쾌하게 소환하고 있음에 행복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