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7월 서유럽서 느낀 다양하고 복잡한 감정들의 수집기(일곱번째)
아침 일찍, 어제 장을 본 군것질거리와 함께 우리 정든 로마의 집을 나서 주차장으로 갔다. 유럽 어디서나 겪은 주차장에서의 작은 에피소드 - 주차권 결재에 관한 것들이다 - 를 거치고 내 렌트카는 니스를 향해 타이어를 떼고 로마시내를 천천히 벗어나고 있다. 오늘 하루 달려야 할 거리는 약 700km. 구글에서 찍은 지도는 만만치 않은 오늘의 여정을 보여준다.
여기 지도를 보면 나는 로마를 벗어나 이탈리아의 서쪽 해안을 따라 북서쪽으로 가야하고 해안으로는 티레니아해를 왼쪽에 두고 반시계 방향으로 돌며 그리고는 리구리아해를 지나 국경을 넘어 니스로 가는 길이다.
아침부터 온전한 저녁까지 운전할 일이 까마득하지만 싫진 않다. 더구나 이 곳은 내 생에 처음 보는 이탈리아의 로드 아닌가. 난 마치 로드무비의 주인공처럼 멋들어지게 선글라스를 코에 걸치고 저 앞 지평선 너머를 잠시 응시한다. 아! 끝없는 이 무수한 길들이여! 너희들은 진정 나를 어디로 인도할 것이더냐?
처음 보는 길이지만 한적한 차량의 운행으로 운전하긴 쉬웠으며 고속도로 주위의 풍경들을 운전 중에 틈틈이 담아보며 지루함을 달래보지만 이내 뜨거운 이탈리아의 태양에 눈이 피로해진다. 중간 중간 휴게소를 들르며 가는 여정. 문득, 이대로 니스까지 곧바로 가기엔 이놈의 이탈리아가 너무나도 아쉬운 생각이 들어 구글 지도를 자세히 보니 얼마 안가 제노바가 나타난다는 것을 확인했다.
“제네바”라는 장소가 나에게는 더 익숙했다. 몇 십년도 더 된 영화지만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라는 강수연 주연의 그 작품 때문일 지도 모르겠다. 아마, 보기는 했을거다.
내 중고등학교 시절, 시내에는 여러 동시상영관이 있었다. 당시 그 영화관의 직원들은 영화홍보를 위하여 동네 곳곳 슈퍼마켓의 셔터문에 영화포스터를 붙이며 자기네 극장서 상영하는 영화를 알리곤 했다. 그러면서 슈퍼마켓 주인에게 영화 관람권을 몇 장 주는데 그게 두 편의 영화를 동시에 싸게 볼 수 있는 할인권이었다. 난 당시 자주 그리고 종종 몇 군데의 단골 슈퍼마켓 주인들에게 그 할인권을 사서 주말에는 동시상영관을 가고는 했다. 씨네마 키드의 중고등학교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그때 봤던 영화들의 장면들은 아직도 내 정서 속에 깊숙이 남아있고 때만 되면 언제든지 - 좋든 나쁘든 - 끄집어내 회상할 수 있는 내 감정의 불쏘시개들이다.
여하튼, 난 제노바로 갈거다. 로마에서 출발한지 거의 6시간째. 난 니스로 가는 길에서 잠시 방향을 선회하여 제노바로 들어간다. 전혀 모르는 도시지만 무조건 제노바의 바다를 볼 수 있는 어떤 곳으로 난 갈거다.
제노바의 시내에 들어선다. 중세의 도시에 온 듯한 생경함. 그러나 자동차 유리창으로 펼쳐지는 장면들은 호기심을 자극하였으며 차가 지나갈 때 스쳐가는 풍경들을 눈에 온전히 담을 수 없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약간은 우중충한 하늘이었지만, 그래서 더 나는 중세의 제노바에 온 듯한 느낌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때만큼은, 정말이지.. 이 놈의 차를 길에 세워두고 제노바의 거리를 산책하며 그 냄새, 소리, 맛, 질감을 몸으로 느끼고 싶었다.
여기는 Porto Antico. 제노바의 관광명소이자 많은 요트, 크루즈선 그 밖의 많은 선박들이 정박할 수 있는 멋진 항구이다. 저 멀리 보이는 크루즈선은 마치 호텔이 옆으로 바다에 누워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벤치에는 여러 사람들이 저마다 제각각의 사연을 품은채 이 시간만큼은 리구리아해가 주는 이 비릿하고 신비로운 기운을 음미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 역시 이 곳의 모든 것을 느끼고 있었다.
여기서 특이한 시설물 - 아니 건축물로 보아야 할까 - 을 보았다.
“Bigo Paranomic Lift” 는 바닷물 가운데 기초 구조물을 설치하고 그 기초 위에 여러 개의 구조용 강관을 조립하여 와이어로프로 연결한 후 가장 긴 구조용 강관에 캐빈을 설치하였다. 캐빈은 관광객들을 태운채로 와이어로프와 연결되어 지상에서 40m 높이까지 올라갈 수 있으며 동시에 와이어로프에 의해 360도 회전을 하며 부두 및 제노바 도시의 전경을 볼 수 있는 장치였다.
건축가 렌조 피아노가 구조물을 설계하고 제작설치는 KONE라는 핀란드 크레인 업체가 수행하였다. 건축가와 크레인업체와의 콜라보! 크레인에 건축적인 미학을 섞는다.. 과연 이탈리아적 시도로 보인다. 기계공학적 측면에서는 전혀 새로울 것 없는 시설이지만 특이한 장소로 사람들에게는 기억될 것으로 보였다.
KONE라.. 너무나도 익숙한 이름이다. Lifting Business에 관계된 사람들에게는 마치 큰 형과도 같은 존재로서 수십 년간 이 업계에서 선두를 유지해오고 있다.
국내 조선소에 있는 대부분 Goliath Crane들은 KONE에서 설계한 컨셉으로 제작 및 설치가 되었고 대형 블록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이 장비는 필수적이다.
스웨덴 말뫼의 눈믈이 기억난다. 스웨덴 조선산업의 쇠퇴로 말뫼라는 도시의 상징적인 존재였던 Goliath Crane이 한국의 울산 현대중공압에 단돈 1달러라는 금액으로 2002년도에 매각이 되었다. 그 후로 20년 이상 흐른 지금. 현대중공업이 견인하는 울산이라는 도시는 인구유출로 인한 공동화를 걱정하고 있으나 스웨덴 말뫼는 새로운 도시로 부활하여 활기찬 르네상스를 맞이하고 있다는 기사를 어디서 본 적이 있다. 인생지사 세옹지마! 인간뿐만 아니라 국가와 도시도 다를 바 없구나...
벤치에 앉아 바다를 바라본다. 이 곳 제노바가 고향인 콜럼버스도 몇백 년 전 이곳에 앉아 저기 먼 바다를 응시하며 미지의 대륙으로 항해의 꿈을 키우지 않았을까 싶다. 돌이켜보면 그때 그 제노바의 Porto Antico는 만감이 교차한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장소와 순간이었고 이것이 바로 이번 여행이 나에게 선사한 멋진 선물이었음을 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얼마 전 “모든 삶은 흐른다”라는 책을 읽었다.
원제목은 "Petite Philosophie de La Mer" 로서 “바다에 관한 작은 철학” 정도로 해석되겠다. 바다와 인생을 여러 측면에서 고찰하며 고단한 삶에 대하여 위로와 용기를 주는 책이었는데 그 중 이 부분이 좋았다.
“바다는 자유를 미루지 말라고 말한다. 진짜 삶을 살려면 중요하지 않은 것, 머릿속에서 종일 떠도는 쓸데없는 잡념과 걱정에서 벗어나야 한다”
나는 아마도 제노바 Porto Antico에서 리구리아해의 이런 속삭임을 듣지 않았을까?
이제 나는 작지만 강한 치유와 위안을 받고 다시 프랑스 니스를 향해 차의 시동을 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