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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백 Feb 01. 2024

8. 순례길의 의미 (4월 12일 수)

40일간 산티아고 순례길 그림일기 

팜플로나 pamplona ~ 푸엔테 라 레이나 puente la reina     

  오늘도 25km 넘게 걸었다. 해가 뜨기 전에 출발했지만, 가로등이 잘 되어있어 헤드랜턴은 필요하지 않았다. 반면 순례길이 차도 바로 옆이라 매연과 소음이 심했다.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보았고, 잘 가꾸어진 넓은 정원이 있는 나바라 대학도 지났다. 노란 유채꽃물결이 곳곳에서 펼쳐졌다. 노란색을 보니 기분이 좋아지며 힘도 났다.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었지만, 중간에 잠시 빗방울이 떨어지다 말았다. 하늘에는 구름이 잔뜩 껴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흐르며, 산을 오르는 우리를 휘감았다. 가시거리는 짧아지고 사방이 온통 구름에 싸이는가 싶더니 바람 방향이 바뀌고 구름은 다시 멀어졌다.     


  바람의 언덕이라고 부르는 에레니에가 전망대에 올랐다. 줄지어 걸어가는 순례자들을 형상화한 거대한 조형물이 있다. 그 조형물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가슴에 뭉클한 감동이 밀려오며 눈물이 찔끔 나왔다.

  주위는 사방이 탁 트여 멀리까지 바라볼 수 있었고 골짜기에서부터 바람이 세게 불어왔다. 크게 숨을 쉬며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니, 순례길을 걷고 있다는 실감과 성취감이 느껴졌다. 감격한 표정의 순례자들은 서로 기념사진을 찍어주며 감동한 얼굴로 마음을 나눴다.     

    

순례 행렬 거대한 조형물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찼다.

  다시 걸었다. 각국 다양한 사람들과 앞서거나 뒤서거나 걸었고, 우리나라 사람도 많이 만났다. 오늘 목적지 푸엔테 라 레이나에 도착했다. 기온이 점점 낮아지며 바람까지 심하게 불어 추웠다. 뒤집어쓴 먼지를 닦아내니 개운하기는 한데 날씨가 추워서 머리가 마르지 않았다. 그래도 배가 고파서 모자 하나 뒤집어쓰고 식당을 찾아 나섰다. 

  브레이크타임이라 대부분 식당과 가게는 문이 닫혀 있다. 겨우 영업하는 식당을 찾았는데 실내에는 자리가 없었다. 머리도 젖고 맨발에 샌들만 신은 나는 추운 야외에서 도저히 먹을 엄두가 안 났다.

  덜덜 떨며 거리를 헤매다 또 다른 식당을 찾았지만 역시 자리가 없었다. 다른 식당을 찾아 나설 힘도 없고 이미 몸이 꽁꽁 얼고 밖은 추워서, 자리가 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실내에서 기다려도 괜찮다고 해서 다행이었다. 

  조금 기다리니 예약이 취소되었는지 직원은 예약석이라는 푯말을 치우고 우리 보고 앉으라고 했다. 우리는 지치고 배가 고픈 상태인데 메뉴판은 스페인어로만 되어있어 아무거나 주문했다. 

  말은 안 통했지만, 직원은 순례자인 우리에게 친절히 대해주었다. 다행히 주문한 음식은 맛있었다. 포도주까지 마시고 디저트로 푸딩과 커피까지 마시니 살 것 같았다.  

    

  몸도 따뜻해지고 배도 부르니 마을을 둘러볼 마음의 여유도 생겼다. 오래된 낡은 건물, 좁은 골목. 돌로 된 길바닥은 중세 느낌 그대로였다. 마을 구경 후 슈퍼마켓에 들러 내일 아침에 먹을 음식을 사서 알베르게(기숙사)로 돌아왔다. 알베르게는 낡았지만, 주방도 사용할 수 있고 충분한 식탁도 있어 좋다.    

 

  대학교 졸업 후 처음 본다는 남편 후배 부부를 알베르게에서 만났다. 남편은 반가워했다. 그 부부는 일정이 빠듯하고 시간적 여유가 없어 여유롭게 걷기 힘들단다. 모든 순례자는 자기 상황과 일정에 맞게 각자 방식대로 걷는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가자는 남편의 제안에 ‘오케이’ 외치고 은퇴까지 선언하고 나선 나였다. 오늘은 순례길을 걷기 시작한 지 나흘째다. 걷다 보면 걷는 의미도 다가오고, 무언가 생각이 성숙하거나 깊어질 줄 알았는데, 여전히 배고픈 것 못 참고, 맛있는 음식에 웃음 짓고, 포만감에 행복해하는 모습에서 달라진 게 없다. 

  이 많은 순례자 가운데 나처럼 특별한 목적이나 이유도 없이 순례에 나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짐을 모두 넣은 배낭을 택배로 보내고, 가볍게 걸어서 덜 힘든 때문일까. 아직 순례 초반이니 더 걷다 보면 답을 얻을 수 있겠지.       

              

우리가 묵었던 공립 알베르게는 낡았지만, 주방을 사용할 수 있고 쉴 공간도 여유 있어 순례자에게는 편안하고 좋은 숙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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