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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백 Feb 01. 2024

10. 남편과 결별하고 싶었던 날 (4월 14일 금)

40일간 산티아고 순례길 그림일기

에스테야 Estella ~ 로스 아르코스 Los arcos      

  등산화를 신으면 발목이 아파서 걸을 생각 하니 까마득했고, 비까지 예보돼 있어 샌들을 신기도 어려웠다.      

  우리 둘의 짐을 남편 배낭에 넣어 택배 보내고, 걸으면서 필요한 물건만 내 배낭에 넣어 남편이 매고 걷는다. 나는 무거운 배낭을 안 메고 걸어서 몸은 편하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다. 내가 생각했던 순례자의 모습은 이런 게 아니었다. 

  하루만 이용한다던 배낭 택배는 이틀, 사흘로 늘어났고 어떻게 하다 보니 매일 이용하고 있다. 아침마다 남편이 배낭 두 개에 짐을 나눠 싸다 보니 시간도 오래 걸리고, 내가 필요한 게 있으면 어느 배낭에 있는지 남편에게 물어봐야 한다. 또 빈 몸으로 걷는 내가 무언가 부족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이런 상황에 짜증 나고 예민해진다. 

  오늘따라 남편은 새벽 5시도 안 된 시각부터 사그락거리며 뭘 하는지 침대에서 움직였고 그 소리는 좁은 알베르게에 크게 울렸다. 나는 창피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에게 미안하기도 해서 신경이 곤두섰다. 

  새벽에 출발하는 순례자들은 다른 순례자에게 방해되니 모든 짐을 들고 일 층 로비로 내려와 챙겼다. 함께 짐을 싸던 순례자들은 준비를 마치고 출발했다. 그런데 남편은 넣었다 꺼내기를 반복하며 오랫동안 짐을 쌌고, 멀뚱멀뚱 지켜보는 나는 그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비는 내리고, 발목은 아프고, 남편에 대한 불만이 올라왔다. 자기 짐 각자 챙기고, 내 배낭은 내가 멜 테니, 당신 배낭은 택배 보내든 메고 가든 맘대로 하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비까지 부슬부슬 더 내렸다. 

  내 얼굴은 이미 폭발 직전 기색이 역력했겠지만, 그 말을 하는 순간 우리 분위기와 관계는 엉망이 될 게 분명해 입을 꾹 닫고 걷기만 했다.

  걷기에는 치유 효과가 있는지, 한참 걷다 보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잠시 후 비가 그쳤고 구름이 잔뜩 끼어있기는 해도 파란 하늘이 얼핏 얼핏 보이기 시작했다.                                                                                

예민해져 폭발 직전이었던 나는 꾹 참고 말없이 걸었다.

  마음속으로 상상 속 연극을 연출하며, 남편을 머슴이라고 설정하기로 했다. 나는 마님이라 배낭을 안 메고 가는 게 당연하고, 남편은 재수 없는 머슴이라 마님 말도 안 듣고, 머슴 주제에 무엇이든 자기 마음대로 한다고 대본을 쓰고 나니 마음에 평화가 왔다. 또 새벽 일찍부터 바스락거렸던 행동도 여유를 갖고 바라보게 된다. 

  그제야 내 눈치를 살피며 걷고 있는 남편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머리가 허옇고, 희끗희끗한 수염이 덥수룩한 모습이 갑자기 안쓰러워 보였다. 자기 딴에는 부인 편하게 걷게 해 주겠다고 여러모로 애를 쓰는 거라는데.

  마을에 들어서니 바(bar)가 보였고, 피곤을 풀어줄 카페 콘 레체(우유 넣은 커피)를 주문하고 설탕을 넣어 달콤한 커피를 마시며 서로 마주 보았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피식 웃었다. 부글거리던 감정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비는 그쳤지만 바람은 세차고 끈질기게 불어 걷기 힘들었다. 등산화는 끈을 반만 느슨하게 묶고 걸으니, 평지는 걸을 만했다. 다행히 오늘 구간 후반부는 끝없는 들판이다. 로스 아르코스에 도착했을 때, 바람은 불고 추웠지만, 하늘만큼은 파랗고 예뻤다. 

  그동안 이용했던 공립 알베르게가 저렴하면서도 시설이 좋았는데 이곳 공립 알베르게는 침대 간격도 좁고 침대 사이 칸막이도 없어 당황스러웠다. 순례자들은 자기 배낭과 짐이 다른 사람 통행에 방해되지 않도록 신경 썼다. 

  봉사자들은 나이가 많았는데 친절했다. 내일 갈 알베르게 예약 전화도 해주는 등 여러 도움을 주셨다. 남편은 빨래집게도 많다며 좋아했다.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사 먹고, 문을 연 식료품점에서 오렌지와 바나나를 샀는데 무척 비쌌다. 그리고 오렌지를 만졌다고 주인의 날카로운 한마디까지 들었다. (작은 가게에서는 손님이 물건을 만지지 못하게 하는 곳이 많다) 몸도 마음도 힘든 하루였다.    

                                              

알베르게에서 보이던 로스아르코스 성당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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