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백 Feb 01. 2024

12. 빌바오 여행 - 달콤한 휴식과 화해(4월 16)

40일간 산티아고 순례길 그림일기 


 

  감기로 컨디션도 안 좋고 남편과 어색한 분위기였지만 계획대로 빌바오로 가기 위해 다른 순례자들과 비슷한 시각에 알베르게(기숙사)에서 나와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오전 9시가 조금 넘어 빌바오에 도착했다. 

  버스터미널에서 예약한 호텔(Bed 4U)까지 걷기에는 애매한 거리였다. 남편은 우버를 부르려 했지만, 앱이 작동되지 않았다. 그냥 걸어가자고 제안했던 나는 기다리다 지쳐 ‘시간 낭비한다’라고 비난했다. 그 순간 남편은 폭발했고 냉랭했던 우리 관계는 위태로워졌다. 

  결국 우버는 부르지 못했다. 남편은 화나고 자존심도 상해 씩씩거리며 혼자 앞서 걸었고, 나도 화를 억누르며 뒤쫓아 갔다. 체크인은 오후에 가능해서 짐만 맡기고 거리로 나섰지만 둘 다 예민한 상태라서 멀찍이 떨어져 걸었다. 

  이번에는 내가 앞서서 빠르게 걸었다. 남편과 거리가 점점 벌어지는 게 느껴졌고 아무 데나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안 보이던 남편은 어느 틈에 쫓아오며 나를 불렀지만 무시했다. 이제는 정말로 각자 다니자고 말하고 싶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나를 따라잡은 후 몇 발짝 뒤에서 말없이 한참을 걸어오던 남편은 영업 중인 바(bar)를 가리키며 들어가자고 했다. 내 이성은 남편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속삭였고, 감정을 누르고 못 이기는 척하며 바(bar)로 들어갔다. 

  커피와 타파스 몇 가지를 주문했다. 따뜻한 음식이 뱃속에 들어가니 날카로웠던 신경들이 누그러들었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니, 나를 끝까지 따라오며 화해하려 애쓴 남편의 노력도 눈에 들어왔다. 함께 음식을 먹으며 편안해진 우리는 자연스레 손을 잡고 빌바오 거리를 나섰다. 

  빌바오는 고풍스러우면서도 아기자기하고 예뻐서 다른 도시와 또 다른 느낌이 든다. 무엇보다 날씨가 좋고 따뜻하다. 햇볕 아래를 걸으니 그동안 순례길에서 추위에 떨었던 몸이 녹는 것 같았다.      


  빌바오에는 구겐하임 미술관과 거대한 거미 조형물이 있다. 그걸 보려고 여기까지 온 거다. 미술관 입장료는 현장 구매보다 2유로가 싼 인터넷으로 16유로에 예매했다. 그러나 우리 목적은 구겐하임 미술관 건물 그 자체를 보는 것이라 입장 시간보다 일찌감치 도착해서 미술관 주변을 구경했다. 멀리 구겐하임 미술관 앞에 전시된 강아지가 보이자, 내 가슴은 두근거렸다. 

  쇠퇴해 가던 철강 도시 빌바오를 살렸다고 하는 구겐하임 미술관은 옆으로 흐르는 강과 조화를 이루며, 입이 딱 벌어질 크기와 위용으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근처에는 미술관을 구경하거나 강가를 산책하는 사람들로 붐볐다. 

  댄 브라운 소설 ‘오리진’을 읽고 궁금했던 거미 조형물과 구겐하임 미술관을 내 눈으로 확인하니 탄성이 절로 나오면서도 한편으로는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소설을 읽는 동안, 정말 빌바오에 올 거라고 생각 못 했다. 

  거미 조형물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크고 괴기스러웠다.     빛을 반사하는 곡면으로 복잡하게 연결된 구겐하임 미술관의 독특한 외관은 내 상상과 기대를 능가했다. 미술관과 거미 조형물을 바라보는데 가슴이 막 떨렸다. 건물이 살아 움직일 것 같았다.     

               

빌바오 상징인 구겐하임 미술관과 거미 조형물을 보니 가슴이 떨렸다.


  구겐하임 미술관이 건립되었을 때, 많은 화가는 자신의 그림이 건물 장식품이 될 거라는 이유로 전시를 거부했다고 한다. 오늘날 구겐하임 미술관이 이렇게 많은 사람을 불러 모으는 것을 보았다면 그 화가들은 후회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술관 앞에 서 있는 거미 조형물은 생각보다 크고 괴기스러워 놀랐다.


   입장 시간을 기다리며 미술관 카페에서 오렌지 주스와 타파스를 샀는데 야외 테이블에 자리가 없어 근처 적당한 돌에 앉아서 먹으려고 쟁반을 내려놓았다. 그때 테이블에 앉아있던 사람이 음식을 입에 막 넣으며 오라고 손짓했다. 자기는 다 먹었으니 앉아서 먹으라며 일어섰다. 낯선 사람의 배려가 고마웠다.      


  시간이 되어 배낭을 맡기고 전시장으로 들어갔다. 전시된 그림을 돌아보았지만, 마음이 들떠서 잘 다가오지 않았다. 내 눈길은 미술관 안으로 들어오는 햇빛과 조화를 이루던 건물 자체에 끌렸다. 아래위층 연결되어 뚫린 공간으로 들어온 햇빛은 건물에 드리워지는 그림자와 조화를 이루며 환상적이면서도 아름다웠다. 넋을 놓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또 나를 사로잡은 것은, 쇠로 된 거대한 조형물이다. 어떠한 보조 장치도 없이 휘어져서 서 있는 거대한 쇳덩어리 판은 놀랍고 신기했다. 빌바오가 철강 도시였음을 상징적으로 알려주는 전시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학적 설계 덕분에 쇠로 된 커다란 판이 휘어진 채 서 있다고 한다. 그에 대한 설명과 영상도 있지만, 스페인어라 그림만 대충 보았다. 강철 전시물은 미술관 건물과 더불어 강한 인상과 감동을 남겼다.

      미술관을 나와 강을 따라 걸어서 주비주리교에 이르렀다. 기둥 없는 곡선 구조를 한 특이한 다리 형태에 저절로 감탄이 나왔다. 다리 위아래를 오르내리며 아름다운 모습을 감상했다. 빌바오는 강한 철과 아름답고 부드러운 예술을 창의적으로 조화시킨 독특한 도시라는 생각이 든다.

  다리를 구경하거나 강을 따라 산책하거나 의자에 앉아 느긋하게 햇볕을 쬐는 사람이 많았다. 우리가 소설 한 장면 안에 들어온 느낌이다.      

기둥이 없고 아름다운 곡선으로 되어있는 주비주리교

 

  호텔(Bed 4U)로 가서 체크인하고 짐을 찾아 객실로 들어오니 간식과 손 글씨로 쓰여 있는 환영 편지가 있었다. 숙박비가 싸서 선택한 호텔이었는데 직원들은 성의 있고 친절했다.

  일요일이라 대부분 슈퍼마켓이 문을 닫았는데 남편은 밖으로 나가더니 어디선가 포도주, 과일, 치즈 등을 사 왔다. 그동안 순례길에서는 포도주 한두 잔 마셨지만, 내일은 걷지 않으니 마음 놓고 포도주 한 병을 다 마셨다. 그리고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남편 생각을 바꾸기는 어렵지만, 남편의 선한 의도를 들으면 내 이해 폭이 커지며 못마땅한 점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게 된다. 남편도 고집이 있어 내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실컷 하니 속이 후련하다.

  그래도 남편은 화해의 손을 먼저 내밀고 내 잘못을 들춰내지 않는다. 그 점은 고맙다. ‘앞으로 순례길 따로 걷자’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고 참은 게 다행이다. 산티아고 순례길 두 번째 휴식지 빌바오에서 꿈같은 하루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11. 그놈의 타파스가 뭐라고. (4월 15일 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