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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백 Feb 01. 2024

14. 나이 좀 있는 우리가 순례길이 가능한 이유

40일간 산티아고 순례길 그림일기

로그로뇨 Logrono ~ 나헤라 Najera      

  순례길 날씨는 일교차가 커서 적응하기 어려운데, 바람이 세거나 비가 내리는 날 체감 온도는 더 내려간다. 나는 그동안 추위와 감기로 고생했는데 남편은 도저히 안 되겠다며 후드 재킷을 사주었다. 

  한국보다 훨씬 저렴하다는 말에 마지못해 샀는데 막상 입으니 따뜻해서 살 것 같다. 걷는 데 적응하면 배낭 택배를 이용하지 않고 각자 배낭 멜 거라는 남편 말에 짐을 늘리지 않으려 버텼는데 후회된다. 미련스럽게 군 것 같다.   

  

  새벽에 걷다 문득 뒤돌아보면 하늘이 붉게 물들며 해가 떠오른다. 이렇게 아름다운 붉은색 해가 떠오르는 모습은 살면서 처음 본다. 뜨거운 무언가가 속에서 올라오며 가슴 벅찼다. 

  걷는 내내 포도밭만 보였다. 연두색 잎이 조그맣게 달려있는데 여름을 지나면 포도송이가 주렁주렁 달린다고 생각하니 자연이 위대하게 느껴졌다.

  어느 포도주 생산 공장 앞에 순례자 포토 존이 있다. 순례자들에게 기념사진 촬영을 유도하며 회사를 광고하는 기발한 아이디어에 감탄하며 우리도 사진을 찍었다. 

  내가 좋아하는 파란색 하늘을 질리도록 보며 걷고 또 걸었다. 순례길 곳곳에 다양한 형태의 수도가 있는데 로그로뇨에서 본 수도는 순례길 표시까지 새겨져 있고 멋져서 내 눈길을 끌었다.                                                                                          

순례길 표시가 있는 오래돼 보이는 멋진 수도는 내 눈길을 끌었다.

  60대 초반 남편과 50대 후반인 내가, 스페인어는커녕 영어도 잘 못 하는데 이렇게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이 문득 신기하게 느껴졌다. 

  남편은 인터넷과 구글이 우리를 자유롭게 해 준다며 핸드폰 앱을 앞세워 순례길과 여행을 이끈다. 매일 숙소 예약, 배낭 택배, 알베르게 생활, 필요한 물건 구매, 버스표 예매, 박물관이나 미술관 예약과 예매 등을 다 해낸다.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며, 유연하고 적극적으로 스마트기기를 활용한다.

  순례길에 적응하면 이용하지 않을 거라고 하면서도 남편이 매일 배낭을 택배 보내는 바람에 나는 혼란스럽고 불만이 생기고 대립하기도 하지만 남편이 대단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얼마 전에 만났던, 남편 후배 부부는 우리 빌바오 여행 계획을 듣고 자신들도 빌바오로 여행하고 싶어 했다. 자식들 도움으로 비행기표나 기차표 등을 예약하고 순례길을 걷기 시작했지만 그 부부는 스마트기기 사용이 자유롭지 않아, 빌바오 여행은 포기했다. 


  남편도 대단하지만, 우리는 순례길에서 친절한 사람들의 도움도 많이 받았다. 

데이터만 쓸 수 있는 우리 핸드폰 대신 전화를 걸어 예약해 준 알베르게 봉사자들, 

슈퍼에서 과일 사는 것을 도와준 계산원, 

배낭을 풀밭에 놓으면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해 준 순례자, 

길을 잃고 두리번거릴 때 다가와 방향을 알려준 동네 사람, 

자리가 없어 돌에 앉으려고 할 때 테이블을 내준 사람, 

영어 안내문과 소책자, 책갈피 등을 챙겨주었던 박물관 직원, 

미술관 직원, 

성당 봉사자, 

파리 드골 공항 관계자, 

카페 직원 등등.

또 순례에 나설 수 있게 사회에서 각자 제자리를 잡은 아들과 딸도 고맙다. 모두 덕분에 내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있다.      


  오늘 걸어야 할 로그로뇨에서 나헤라까지 29km라서 일찍 출발했지만, 거의 평지로만 이루어져 있고, 날씨도 화창하고, 바람도 세지 않아서 생각보다 일찌감치 나헤라에 도착해서 하루를 잘 마무리했다.     

포도나무가 줄지어 선 포도밭. 걷고 또 걸어도 포도밭만 보이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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