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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백 Feb 01. 2024

15. 남편의 변화 (4월 19일 수)

40일간 산티아고 순례길 그림일기

나헤라 Najera ~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 Santo Domingo de la calzada      

  어두컴컴한 새벽 거리로 나섰다. 고요 속에 우리 발걸음 소리와 새소리만 들린다. 새들이 그렇게 다양한 소리를 내는지 순례길을 걸으며 처음 알았다. 걷다 보면 주위가 점점 밝아진다. 눈에 보이는 것이 많아지면 귀에 들리는 것은 줄어든다. 뒤돌아보면 해가 떠오르고 있다. 

  어제도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았지만, 장소, 날씨, 구름이 달라져서인지 어제와 또 다른 모습이다. 아름다워서 넋을 놓고 한참 바라보다 겨우 발을 옮겼다.    

어제 해와 다르게 보이는 오늘 떠오르는 해를 넋을 놓고 한참 바라보았다


  넓은 평야를 걸었다. 초록색 끝없는 밀밭, 새싹이 자라기 시작하는 포도밭, 노란 유채꽃밭이 반복되었다. 파란 하늘, 눈물이 나도록 푸르고 시린 파란색이 지평선까지 계속 열렸다. 내가 좋아하는 파란 하늘을 질리도록 보았다. 사방은 고요했다. 우리는 고요 속에서 말을 점점 잊었고 생각도 잊었다. 바람이 흘러가는 소리만 들렸다. 

  순례자들 모두 자기 방식대로 걷는다. 부활절 휴가 기간이 끝나서인지 순례자가 줄어들었고 순례길은 좀 더 차분해진 느낌이다.

  우리는 걷다가 지칠 즈음 나타나는 마을 바(bar)에 들어가 카페 콘 레체를 마시거나, 적당한 공원이 보이면 신발과 양말까지 벗고 쉬며 배낭에서 간식을 꺼내먹는다.    

응원 메시지 같은 순례자 조형물을 보면 새로운 힘이 난다.


  남편은 갈림길에서 안내 화살표가 바로 눈에 안 보이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직감대로 방향을 잡고 걸었다. 대부분 그 길이 아니라 걸어간 만큼 되돌아와야 했다. 몇 차례 경험 후, 나는 갈림길에서 멈추어 순례길 표시를 찾거나 구글 지도로 갈 방향을 확인했다. 종종 다른 방향으로 간 남편을 불러야 했다. 

  오늘은 갈림길에 이르자, 남편은 자기 생각대로 해왔던 습관을 고쳐야 한다며 멈추었다. 두리번거리며 순례길 방향 표시를 찾아 확인하더니 걸음을 옮겼다. 남편으로서는 정말 큰 변화다.      


  23km 평지를 무난하게 걸어 목적지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에 도착했다. 우리가 쉬어갈 공립 알베르게(Albergue Casa de la cofradia del Santo)는 넓고 시설도 좋았다. 그런데 택배로 보낸 배낭이 도착하지 않았다. 배낭을 분실한 건 아닌지 불안했다. 샤워, 빨래도 못 하고, 오후 계획도 변경했다. 일단 근처 마트에서 장을 봤다. 

  연어 샐러드를 만들고, 감자칩, 치즈 케이크를 안주로 포도주 한 병을 다 비우고 나서야 배낭이 도착했다. 세상은 늘 계획한 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저녁에 성당을 보러 나섰다. 5유로 입장료에 성당 두 곳, 종탑, 기도실을 볼 수 있다.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 성당을 먼저 보았다. 내부는 화려했고, 개인 성당도 다채롭고, 회랑에는 많은 전시물이 있다. 특히 돌과 타일을 이용한 모자이크로 섬세하고 화려하게 벽을 장식한 지하 방은 아름다워서 감탄이 절로 나왔다. 

  130개가 넘는 돌계단을 빙빙 돌아 올라가니 머리 바로 위에 종이 있다. 종탑 꼭대기에서 내려다본 들판과 어우러진 집들이 예뻤다. 줄을 잡아당겨 종을 치던 시대에 뚫어 놓은 구멍이 계단에 그대로 남아있다. 그 후 종을 자동으로 울리게 했던 톱니바퀴와 기계 장치들도 전시되어 있다. 

  기도실도 보고, 산 프란시스코 성당까지 가보았다. 순례길에서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에서 묵게 되면 성당 투어는 꼭 해보라고 추천한다. 

   내일 걸어야 할 방향을 알려주는 순례길 표시를 확인하고 알베르게로 돌아왔다. 밤 9시가 되도록 햇빛은 쨍쨍했고 사람들은 여전히 거리를 메우고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     

종탑 꼭대기에 오르니 바로 머리 위로 매달린 종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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