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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미경 Sep 18. 2023

그날의 진실

 둘 다 하얘서~

어릴 적에 나는 미숫가루로 인해 하루를 365일 같이 보낸 일화가 있다.


미숫가루는 여름이 다가오기 전에 미리미리 마련해 놓아야 하는 농촌생활의 필수 비상식량이었다.

집집마다 심은 곡식들로 취향대로 입맛대로 만들어 

아이들에서부터 어머니, 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즐기는 최애 간식이기도 했다.

우리 집에서는 밭에는 밀을 심어 밀가루를 내어 수제비와 밀떡을 하고, 논에 심은 벼와 보리로는 미숫가루를 만들어 무더운 여름을 났다. 다른 집에서는 여러 잡곡을 골고루 섞어 미숫가루를 했지만 입맛에 한고집하는 우리 6남매의 애원으로 80% 이상의 쌀이 들어간 우리 집 미숫가루는 유독 뽀얀 색을 띠었다.


여름이 막 시작되었을 무렵이었다.

시계에 따라 움직이는 도시와 달리 농촌은 해의 출입에 따라 움직이니 

더위를 피해서라도 해가 떠오르기 전에 어른들은 일찌감치 일을 하러 나가신다.

그날 엄마는 "작은 방에 미숫가루 해 놨으니 동생이 배고프다 하면 타 먹이라" 하고서는 

아침 일찍 밭일을 하러 가셨다.


집에는 5살 터울의 남동생과 나뿐이었다.

뭘 하고 놀았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지만 한참이 지나니 동생이 배고프다 하였다.

나는 엄마의 당부도 있고 해서 미숫가루를 타 줄 요량으로 그릇을 챙겨서 작은방에 들어갔다.

커다란 다라이 2개에 뽀얀 가루가 가득 담겨 있었다.

당연 모두 미숫가루겠거니 여기고, 별생각 없이 손이 먼저 닿는 곳의 가루를 서너 숟가락 그릇에 퍼 담았다.

눈대중이긴 하지만 미숫가루, 물, 설탕을 황금비율로 넣고서 가루가 뭉치지 않도록 저어서 동생에게 건넸다.

한 모금 마시던 동생이 미숫가루 맛이 안 난다 했다.

'뭐가 부족하지? 초콜릿을 넣어볼까' 맛을 되살리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어찌해서 우리 집에 초콜릿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초콜릿을 가루 내어 미숫가루에 넣고서 다시 한번 잘 섞이도록 저어 동생에게 건넸다.

잔뜩 기대를 하고서 한 모금 들이키더니 동생은 이번에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동생의 미심쩍은 반응에 나는 초콜릿까지 넣었는데 맛이 이상할리가 없다며 그냥 먹어라고 부추겼다.

나의 성화에 떠밀려 동생은 마지못해 남은 미숫가루를 마저 들이켰다.


미숫가루 맛이 애매모호하긴 했어도 배도 차겠다 싶었는지 동생은 친구들과 논다며 바깥으로 나갔다.

혼자 집을 지키던 나는 딱히 할 일도 없고 심심하던 차에 

작은 방에서 멀뚱멀뚱 눈을 굴리다 2개의 미숫가루 다라이를 찬찬이 살펴보았다.

어머나! - 세상에! - 큰일 났다! - 새파랗게 질린 혼비백산한 얼굴을 봤어야 하는데....... 

얼핏 봐서는 다라이 2개에 있던 뽀얀 가루가 똑같아 보였는데 자세히 뜯어보니 색이며 입자가 

아주아주 미세한 차이를 보였다. 하나가 더 하얗고 부드러웠다. 그것의 정체는 바로바로 밀가루였다.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니 이맛이 그 맛이고 그 맛이 이맛이었지만 확실히 밀가루였다.


아뿔싸! 동생에게 밀가루를 타 먹인 것이다.

눈앞이 하얘졌다. 정신이 아득하여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동생이 배탈이라도 난다면 뒷감당을 어떻게 해야 할지, 

'어휴! 어휴! 내가 왜 그랬을까. 동생이 맛이 이상하다 했을 때 먹어볼 걸' 뒤늦은 후회와 자책을 하다가,

'아니야 엄마가 미숫가루만 얘기해잖아'

'다라이 크기며 모양도 똑같지. 미숫가루 밀가루 둘 다 하얗잖아. 내가 어떻게 알겠어'

'밀가루도 있다고 말했어야지. 난 잘못 없어. 다 말 안 한 엄마 탓이야'

엄마에게 화살을 돌리며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그야말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점심께 밭일을 마치고 돌아온 엄마는 다라이 하나는 밀가루라고 그제야 말씀하셨다.

전날 방앗간에서 밀가루와 미숫가루를 한꺼번에 해 오셔서 그대로 두고는

다른 하나는 밀가루라고 말한다는 것을 깜빡했다고 하셨다.


"맞지, 보니까 하나는 밀가루더라고"

나는 사정없이 요동치는 심장을 꽉 밟아 누르며 동생이 배고프다 해서 미숫가루 한 그릇 타 줬다고 간신히 

얼버무렸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 은근슬쩍 나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엄마가 말하기도 전에 미숫가루 한 

그릇 타서 얼른 내어 드렸다. 땡볕에 고생했는데 시원하게 드시라 하고선 엄마가 미숫가루 그릇을 내려놓을 때까지 두근반세근반 눈치를 살피며 이번 것은 확실한 미숫가루임을 거듭 확인받았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어물적 상황이 종료되고 나서야, 점심 먹으러 집으로 돌아온 동생 덕에 

그날의 미숫가루와 밀가루에 대한 진실은 쥐도 새도 아무도 모른다. 


다행히 동생은 무탈했고 식은땀이 흐르던 긴긴 하루가 지네가 신발 갖춰 신듯 지나갔다.

그 이후로 나는 아무에게도 그날의 진실을 밝히지 않았다.

'모르는 게 약이다'라고 여기며 미숫가루와 밀가루에 관한 불편한 진실을 봉인해 버렸다.


미숫가루만 보면 자동 재생되는 그날,  나는 자꾸만 실없이 삐질삐질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다.


동생아, 미안해.

그때 네가 마신 건 미숫가루가 아니란다.

둘 다 하얘서 누나 정말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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