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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미경 Oct 21. 2023

나는 선구적 급식학교를 나왔다

급식은 우리 학교가 원조!

랄라라 음악소리 들리면 우리 모두 손을 씻고 식당에 가죠

식판도~     챙기고~             수저도            챙겨서~ 

차례차례 줄어지어 맛있게 먹죠~


이 노래는 지금은 폐교된 지 오래지만 1980년대 초 내가 다녔던 국민학교의 점심시간에 울려 퍼진  

'급식노래' 중 하나로 그 일부 가사다.

'나의 은사님을 소개합니다'에 등장하신 선생님 자작곡으로 선생님의 풍금 반주에 맞춰 다 같이 목소리를 

높이며 불렸더랬다. 이외에도 몇 곡이 더 있었는데 이제는 기억이 흐려지고 가물가물하여 

그나마 앞소절을 유일하게 부를 수 있는 노래다.



나는 선구적 급식학교를 나왔다.

1970년대 후반 국민학교 시절, 나는 점심으로 학교급식을 먹었다. 

가끔씩 나의 언니들과도 급식을 화두에 올려놓고 급식 변천사를 신명 나게 논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1970년대 초반부터 모교의 학교급식이 시작되지 않았을까 싶다. 


급식 메뉴는 지금이랑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훌륭했지만, 

당시 첩첩산중 시골에서 처음 접해보는 것들이라서 오히려 더 눈부셨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빵이 나오는 날에는 커다란 소부르 빵, 전지분유에 설탕을 넣어 조금 단맛이 나는 따스한 우유, 고소한 수프, 삶은 달걀, 마요네즈에 버무린 알록달록 과일채소 샐러드로 구성되었다.

나는 빵 하면 어른 손을 쫘악 편만큼의 큼직한 크기였던 빵 위에 한가득 옹골차게 올려진 몽글몽글한 

소보르를 떼어먹으며 느꼈던  달콤 고소 쫀득 바싹함에 지금도 살라라~ 구름 위로 붕~ 떠 오른다.

카레라이스, 하이라이스, 돈가스, 잔치국수, 자장면, 삼계탕, 육개장 등  매일매일 화려하게 식단이 바뀌니 

오늘은 뭐가 나올까 기대하며 급식 먹는 재미로 학교를 다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처럼 완전 무상은 아니었다. 

2000원보다는 많고 3000원 아래였던 급식비를 납입하는 누런 봉투가 있었고 매달 도장이 찍혔다.


처음엔 1~2학년들은 4교시만 하니 급식이 제공되지 않았으나 

대신 배식을 마치고 여유 있게 음식이 남으면 저학년들에게 나눠 줄 때가 가끔 있었다. 

빨간 완숙 토마토와 껍질 색이 푸른 인도사과를 받아 들고 

신이 났던 나는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가 동생과 나눠 먹었던 기억이 있다. 


3학년이 되어 급식을 처음 시작할 때 밥그릇과 국그릇을 하나씩 들고 갔다. 

집집마다 사용하는 그릇이 다르다 보니 배식을 받다 보면, 

내 그릇이 아닌 골동품 같은 그릇을 마주칠 때가 있었다. 

이후에 전 학년 급식을 실시하였다.


급식실은 영양사 선생님과 주사님 한 분이 책임지셨고 동네별로 엄마들이 모둠을 이루어 조리봉사를 하셨다. 엄마가 오는 날 배식받을 때는 왠지 특별식을 받는 기분이 들었다. 

조리봉사하러 오신 엄마들이 '우리 강아지', '우리 동네 아이'하면서 다들 더 살갑게 챙기는 퉁에, 

자기네 마을이 급식당번이 되면 기분이 한껏 들떠 우쭐해했다.


우리 엄마는 급식실에서 인기 최고이셨다. 

농번기에 급식봉사 차례가 닥치면 엄마들이 난감해하기도 했지만, 

우리 엄마는 농사일을 잠시 제쳐 두고서라도 다른 사람 몫까지 참석하셨다. 

영양사 선생님은 음식 솜씨 좋은 우리 엄마가 오는 날을 벼르고 있다 김치를 담그고 미뤄 둔 일을 마무리 짓곤 하셨다. 조리과정에서 예기치 않게 발생하는 문제들을 척척 해결하는 엄마의 고견에 해법을 찾고서, 

늘 감사해했다는 후문이 들렸다.


배식도 처음엔 남학생들이 운동장을 가로질러 급식실로 달려가 학년별로 마련된 점심을 받아왔다. 

국통, 밥통, 식판, 수저, 찬통 3개를 남학생들이 총출동하여 가져오면, 

여학생들이 교단에 앉아 하나씩 맡아서 분배했다. 

많이 달라, 좋은 것 달라, 큰 것 달라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한참 남학생과 여학생이 편이 갈라져 있을 때 우리는 배식으로 남학생들에게 소심한 복수를 했다. 

간혹 삶은 달걀처럼 몫이 1인 1개씩인 경우 

껍질이 깨져 모양이 일그러진 못난 것을 남학생들에게 주는 식으로 콩알 같은 주먹질을 콩콩콩 날렸다. 

비가 오고 눈이 올 때면 선생님과 반학생을 합쳐 총 24인분의 밥통을 

급식실에서 가져오고 반납하는 방식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5학년 2학기부터였는지 확실치는 않지만 급식실 옆에 있던 1~2학년 교실을 개방해 식당으로 사용하면서부터 빗물이 들어갈까 흙탕물을 첨벙거리며 전력질주하던 남학생들의 볼멘 불만이 깔끔하게 해소되었다.


나는 육상부라서 방과 후에 훈련을 하다 간식을 받기 위해 급식실에 들락날락하면서 

급식실 내부를 구경할 기회가 있었다. 

보통 국을 끓이는 어마어마하게 큰 가마솥이 있었고 밥 찌는 기계, 빵 굽는 기계가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밥을 솥에서만 하는 게 아님을 알게 되었다. 

전교생 160여 명에 선생님과 어머니들까지 넉넉 잡아 200여 인분을 한 번에 감당할 가마솥이 

어디 있겠냐마는 밥을 끓이는 게 아니고 찐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당시에 모든 국민학교가 급식을 실시했냐면 그것은 아니었고 산골 깊은 농촌학교 일명 벽지학교라서 받은 

특혜였다. 버스로 불과 10여분 거리에 있던 학교는 제외되었으며 급식을 시작한 학교의 얘기를 들어봐도 

모교의 식단구성만큼 우수했던 곳은 없었다. 



아우라를 내뿜는 점심 먹거리에 태평성대 같은 학교를 다니다 중학교를 가니 

도시락을 싸야 하는 해괴망측한 일이 벌어졌다. 

상급학교로의 진학에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다 난데없는 점심 도시락 문제로 

나뿐만 아니라 동창들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탄식을 쏟아내며 모교의 급식을 그리워했다. 

점심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에 따끈따끈한 국을 먹다 

하루아침에 차가운 양은 도시락밥을 먹으려니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다시 국민학교로 돌아가고픈 마음 굴뚝같았다.

6개 국민학교가 모인 중학교에서 우리가 열변을 토하다시피 하는 급식메뉴에 

다른 출신학교 친구들은 마치 신세계 이야기를 듣는 듯 부러움의 눈망울을 밝혔다.


40년도 훨씬 전에 나는 지금의 우리 아이와 같은 학교급식을 누렸으니 

내가 얼마나 큰 복을 받고 자라났는지 새삼 느낀다.


선생님들의 열정과 어머니들의 수고로 해를 더할수록 엄청나게 발전했던 모교의 선구적 급식은 

동창생들 사이에 오늘날까지 여전히 자랑거리로 회자된다.

"그때 말이다, 그때 그 급식 참말로 좋았다, 안 그러냐?"

"아무렴, 지금으로 치면 급식은 우리 학교가 원조 중의 원조지, 정말로 대단했지!"

"맞다! 그 시대에 우리가 점심 걱정 없이 처음 보는 신기한 것들 많이 묵었다 아니가, 모든 게 다~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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