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과 홍시
지난해 큰언니가 보내준 대봉감홍시를 먹고는 씨를 화분에 뱉어 두었다.
올해 봄이 되더니 싹을 하나씩 틔우는 게 아닌가.
반가움도 잠시 어느 정도 자라다가도 말라비틀어져버려 속상하게 만들더니,
뒤늦게 나온 싹 2개는 고맙게도 반년을 훌쩍 넘기며 잘 자라주고 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이제 자리를 잡은 것 같으니 잘 키워서,
감나무 아래에서의 환희를 다시금 느껴보고 싶은 야무진 꿈을 품어본다.
"툭 쭈르르 퉁, 추르 핑 추르 퐁, 통~ 팅~ 퍽"
감잎을 타고 요리조리 미끄러지면서 나뭇가지에 살짝 쿵 부딪히면서 감홍시가 땅으로 내려왔다.
탐스러운 자태로 일찌감치 찜 해 둔 반시감홍시의 낙하소리는
오감이 즐거운 먹거리 축제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밭일을 하다 짬짬이 들려오는 경쾌한 가을의 소리에 귀가 번쩍 뜨여 쪼르르 달려가 감홍시를 거둬들였다.
얼마나 옹골찬지 수미터를 낙하했음에도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했다.
살며시 반으로 가르면 촘촘한 실타래가 쩍~ 갈라지면서
타박타박한 밤고구마에 촉촉한 푸딩을 올려놓은 듯한 절묘한 맛이 났다.
지금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환상적인 맛이다.
이 맛에 길들여져 우리 집 6남매가 제 돈 주고 안 사 먹는 것 중 하나가 감홍시다.
초가을 대추를 털 때 새참으로 제격이었던 반시감홍시 뒤를 이어
늦가을에 수확해서 곶감, 감 말랭이, 홍시로 먹는 고종감이 있었다.
고종감은 완연한 주홍빛을 띠어도 여전히 떫고 단단하다.
가을걷이를 마친 늦가을,
긴 대나무로 만든 감집게로 따닥따닥 가지를 꺾어 고종감을 따 와서는 곶감을 만들었다.
감 껍질을 돌려 돌려 깎아, 대꼬챙이에 줄줄이 꿰어, 새끼줄로 엮어서,
처마 밑 서까래에 대롱대롱 매달아 겨울을 맞이한다.
낮에는 따사로운 햇살로 밤에는 찬서리로 치장을 겹겹이 하더니 어느새 뽀얀 분이 피어났다.
흠집이 생긴 감은 얄팍하게 썰어 감쪼가리(감 말랭이)를 만들고,
나머지는 항아리나 상자에 담아 두면 시간이 지날수록 말랑말랑 달콤한 홍시가 되었다.
긴긴 겨울밤 군불 지핀 따끈따끈한 아랫목에 배를 깔고서,
엄마옆에서 옛날이야기를 들어며 고종감홍시를 초로록 초로록 찹찹거리며 먹었더랬다.
이야기 끝나기가 무섭게 자꾸 하나만 더 해달라고 졸라대면서 말이다.
낮에는 어디에 숨겨뒀다 밤만 되면 꺼내와서 요렇게 재미난 이야기를 맛 보여주시는 건지
별도 달도 귀 기울이는 밤, 나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엄마의 이야기보따리에 쏙 빠져들었다.
"한 양반이 감나무 근처를 지나다,
빨갛게 익은 감홍시가 주렁주렁 달린 것을 보고는,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어떻게든 맛을 봐야겠다고 마음먹었지.
양반 체통에 원숭이 마냥 나무에는 기어오를 수없고,
감나무 밑에 누워 입을 크게 벌리고서, 감홍시가 떨어져 입안으로 굴러들어 오기만을 기다렸지.
이게 웬걸 감홍시는 떨어지는 쪽쪽이 입을 비켜 떨어져 양반의 애를 달궜지.
눈에 퍽~, 볼에 퍽~, 눈탱이 밤탱이에 뺨을 수차례 얻어맞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지.
양반은 벌떡 일어나 앉더니, 갓끈을 풀어 갓을 벗었지.
다시 도로 누워, 갓 옥로를 입에 물고 하늘의 홍시를 향하여 양태를 받쳐 잡고 기다렸지.
그제야 감홍시가 툭 떨어지더니 양태를 한 바퀴 떼구루루 굴러 갓모자로 톡 들어오는 게 아닌가.
얼씨구나! 양반은 감홍시를 먹으며 '음~ 이 맛이야!' 황홀경에 빠졌지"
" 무슨 일이든 쉽게 되는 건 없다. 얻고자 하는 것이 있으면 작은 거라도 노력을 해야 되는 거라 "
엄마의 훈육 한 말씀으로 끝맺음한 감홍시이야기의 교훈을 아로새기며 겨울밤이 하하 호호 맛있게 익어갔다.
엄마,
지금은 어떠신가요? 편안하신가요?
엄마는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삶의 지혜를 가르쳐 주셨지요.
중학교 이후로는 집을 떠나 줄곧 타지에서 생활하였으니
반세기를 넘는 제 인생에서 초등학교 4학년 그 무렵이 엄마와 함께 보낸 가장 따뜻한 겨울밤이었습니다.
지혜가 목마른 오늘밤은 엄마의 따스한 전래동화가 무척이나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