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미경 Nov 11. 2023

보리갈이와 썰매

보리밭 사잇길로 ~ 이랴, 이랴!

흰 눈 사이로 썰매를 타고 달리는 기분 상쾌도 하다

종이 울려서 장단 맞추니 흥겨워서 소리 높여 노래 부른다


늦가을 고향의 들녘에서는 벼를 거둬들이고 잠시 숨 돌릴 새도 없이 바로 보리갈이가 시작되었다.

태어나는 아이가 곧 노동력이었던 시절에 보리갈이 하는 날이면 우리 6남매가 총 출동하여 일손을 보탰다.

또한 동네에서 제일가는 뿔을 가진 우리 집 누런 소의 활약을 기대하며 두근두근 설레었던 날이었다.



마을에서 제일 너른 '너 마지기' 논에서, 곧게 쭉 뻗은 아득한 고랑에 한 줌 두 줌 보리씨앗을 뿌리고 

거름을 살살 흩뿌려 넣고 흙을 덮는 일련의 과정이 이른 아침부터 하루해가 다 저물고도 늦게까지 이어졌다.

입동이 낼모레인 지라 날은 찹찹하고 퇴색한 흙먼지들이 삭풍에 날려서 

옷깃을 바싹 세워 여민 우리 가족은 내년 푸른 봄을 기약하며 보리갈이에 열을 올렸다. 


힘들지 않은 노동이 어디 있겠냐 마는 

멋모르는 어린 나는 보리갈이의 하이라이트 '소 썰매'를 탈 생각에 그저 신이 났었다.

루돌프가 끄는 썰매가 아닌 우리 집 누렁 소가 끄는 썰매.

얼음 위에서 타는 얼음썰매, 눈 위에서 타는 눈썰매가 아닌 

보리갈이하는 논에서만 탈 수 있는 '논썰매'를 우리 6남매는 차례대로 대물림하여 탔다.

나의 마지막 썰매는 서너 살배기 동생과 함께 탄 썰매였다. 

그날의 나는 밧줄을 꼭 부여잡고 얄랑거리는 소꼬리에 몸을 움찔움찔하면서도 신바람이 났었다.


씨, 씨, 씨를 뿌리고

톡, 톡, 톡 거름을 넣고서  

보리갈이의 마지막 과정 흙을 덮을 때 소가 동원되었다.

소의 등에 나무로 만든 농기구를 매달고 넓적한 썰매를 연결하여 소가 썰매를 끌면, 

이랑의 흙들이 보리골로 내려앉아 씨앗을 감싸 안으며 평평하게 덮였다. 이러면 보리갈이가 마무리된다.


아버지는 썰매에 무직한 돌 대신 그에 버금가는 우리를 태워서, 

1년에 한 번만 개장하는 달콤 살벌한 놀이 공원으로 입장시켰다.

씨앗을 넣은 고랑을 양옆으로 두고, 

가운데 고랑에 위치한 아버지가 맨 앞에서 고삐를 당겨 소를 이끌며 달렸다.    

누렁 소가 뒤따라 달려 나가면 두둑하게 올라와 있던 이랑의 흙들이 씨를 뿌린 2줄의 골을 메웠다.

아버지와 소가 합이 잘 맞아 속도가 붙으면 붙을수록 궁둥이가 털썩털썩 사정없이 찍혔다. 

궁둥이가 시퍼렇게 멍이 들든 말든 개의치 않고 동생과 나는 "야호" 함성을 지르며 썰매를 제대로 즐겼다.

요롷게 재밌는 일에도 마음 단단히 먹고 썰매에 올라타야 했다.

간혹 소가 꼬랑지를 흔들다거나 볼일을 볼 때면, 

험한 꼴을 당할 때가 있어서 눈 크게 뜨고 여차 하면 피해야 했다.


썰매가 지나간 자리에 엄마는 쇠스랑으로 쓱~ 쓱~ 쓱 흙을 고르고, 

저기 저 앞 고랑에는 오빠와 언니들이 삼태기에 거름을 퍼담아 

옆으로 옆으로 재빠르게 발걸음을 옮기며 탈~탈~ 탈 보리씨앗 위에 흩날리듯 뿌리고,

서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하는 해를 보고  "이랴, 이랴" 아버지는 소를 더 빨리 재촉하고,  

우리 집 누렁 소도 "음메~ 음메~" 화답하듯 다시 힘을 내어 달려 나갔다.



보리 새싹이 돋아나 거무스름한 흙을 푸르게 채울 때면  

온종일 쪼그려 앉아서 호미질을 하여 잡초를 제거하던 보리밭매기.

북풍에 얼굴 베이고 봄볕에 뽀얀 얼굴 다 그을려가며, 뒤뚱뒤뚱 오리걸음으로 나아가며 보리밭을 맸다.

끝이 보이지 않는 고랑에 거친 한숨이 연발 터져 나오며 주저앉아버리고 싶은 심정 꿀떡 같았지만,

언제나 우리보다 한골을 더 보태어 매맨서도 앞서가는 엄마를 보면 볼멘소리가 쑥 들어갔다.

파릇파릇 보리밭에 사람소리 온데간데없고 호미질 소리만이 자욱했다. 


보리까락이 끈적끈적한 몸에 엉겨 붙어 

바늘로 콕 콕 찔러대는 것 같은 따가움과 울긋불긋 생채기로 몸살이 났던 보리타작.

아버지의 힘찬 구령 소리에 맞춰 

"휘리릭 탁, 휘리릭 톡, 휘리릭 틱" 내 키보다 큰 도리깨를 여차 저차 겨우 돌려가며 보리이삭을 두드릴 때, 

한 발로 발판을 밟고 탈곡기에 한 뭉치의 보리이삭을 먹이여 요리조리 돌려가며 낟알을 떨어낼 때, 

까슬까슬 누리끼리한 보리까끄라기가 날려 

허름한 옷과 연약한 피부에 깊숙이 파고들어 몇 날 며칠을 가려움과 따가움으로 혼쭐이 났었다. 

어디에 박혀있다 찔러대는지 옷을 아무리 털어대고 보이는 쪽 쪽 잡아내도 그것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나는 농사일 중에 모내기할 때 거머리, 보리타작할 때 보리까끄라기, 이 두 가지가 제일 무서웠다.



세월이 가니 이제는 고되고 고되었던 지난날 다 사라지고 

사르르 일렁이던 보리의 푸른 숨결소리와 

씽 씽 씽 달렸던 썰매에 "이랴, 이랴" 소리만이 즐겁게 메아리친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발을 멈춘다

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며 고운 노래 귓가에 들려온다~~~





작가의 이전글 마루야, 산책 가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