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날의 절규
"좀만 땡겨주소"
"학생들 다 태워 가야지예"
"뒤로 조금만 더 땡겨봐라"
차장언니의 매서운 눈은 1센티미터의 여유도 용납하지 않았다.
날카로운 손짓을 더해 끈질긴 추적 끝에 두발 들여놓을 바닥을 찾아내어
끝내 기어코 마지막 남은 학생 1을 창문으로 쑤셔 넣었다.
우~와! 그 많던 사람들을 다 태우다니,
정말이지 미션 임파서블 그 자체였는데, 위대한 쇼를 보여준 차장언니!
겨우 출입문을 닫고 "오라이"를 외치는 차장언니의 쉰 목소리에
종착지가 SH동이었던 버스에 몸을 실은 사람들, 숨 죽였던 소리를 높이 치켜들었다.
"탔다! 탔어! 아이고야! 다 탔네!"
1980년대 고향의 농촌버스,
추석 대목장날 토요일 오후 3시 10분,
기점과 종점의 중간지점이었던 중학교 앞에 도착하던 이 버스는 악명 높은 지옥버스였다.
4교시 오전수업을 마친 토요일,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3시간여를 기다렸다 지옥버스를 타는 것뿐이었다.
일찌감치 가방줄을 세워놓고 학교 주변을 방황하는 학생들,
모두가 초등학교 동창들로 중학교 선후배사이였다.
자취생들까지 더해지는 토요일은 평소에도 복작거렸는데,
오늘은 민족이 대이동 하는 추석 앞 마지막 장날이지 않은가.
주인 대신 따가운 햇볕 아래 죽치고 앉아 버스를 기다리는 책가방,
안 봐도 빤한 시나리오에 걱정이 한아름이었다.
차례용품 장만하러 나오신 고향 어르신들,
읍내 고등학교에 다니는 자취생 언니 오빠들,
선물꾸러미 한아름 안은 귀성객들로
출발할 때부터 이미 만원이었던 버스가 100여 미터 앞에서 천천히 기어 왔다.
태풍의 눈 한가운데로 버스가 들어서자,
축 처진 책가방을 일으켜 세워 든 학생들 얼굴엔 찹찹한 긴장감이 역력하였다.
학교 앞 버스 정류장, 비장한 정적만이 일시정지된 채로 포효하였다.
버스를 타려는 자와 버스를 탄 자, 서로를 응시하며 발사하는 눈빛에 불꽃이 튀었다.
번갯불에 콩을 3만 6천 번을 볶아먹고도 남음 직한 시간이 흐른 후에야
버스문이 빼꼼히 열리면서 차장언니가 툭 튕겨 나왔고,
압축이 해제되자 출입문쪽에 간당간당하게 매달려 있던 사람들도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머리수보다 배로 많은 신발들을 따닥따닥 빈틈없이 배열시켜 놓은 깜깜한 버스 맨바닥,
발 한 짝 받아줄 인정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탈 수는 있으려나' 기대가 무너지니, 정렬해 있던 대열이 산만하게 흩어졌다.
60여 명의 좀비 학생들, 일제히 괴성을 지르며 버스를 향해 저돌적으로 덤벼들었다.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고 우왕좌왕, 각자도생으로 버스에 오르려고 기를 섰다.
자리에 앉은 사람, 창문으로 책가방을 넘게 받아 탑 쌓기를 겨루었고,
학생들은 좌석 사이사이공간을 비집고 들어가, 잠시 염치를 내려놓고 따닥따닥 조밀하게 심겼다.
운전기사님 전용문으로도 타고, 창문으로도 기어들어가고, 안에서 당기고, 뒤에서 밀고 야단법석이었다.
차장언니, 의자 위를 억척스럽게 옮겨 다니며 조금씩 당겨달라 간절히 호소하였다.
알고 보면 모두가 얼굴 터놓고 지내는 이웃사촌들인지라,
이 버스를 놓치면 4시간여를 더 기다려야 함을 알기에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타자, 태우자, 당겨라, 밀어라, 영차 영차,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한 발짝씩 한 발짝씩, 옮겨 옮겨,
차장언니의 안내대로 신들린 듯 무언의 구호를 외치며, 미션 클리어, 퍼펙트를 기록했다.
1명 탈 구멍조차도 보이지 않던 만원 버스에 적어도 60여 명이 넘는 학생들이 더 올라탔으니,
그때의 버스는 고무줄 버스였음에 틀림없다.
초만원인 된 버스는
조그만 돌부리에 걸려도, 아주 낮은 턱에도 공처럼 통통 퉁퉁 탕탕 튕겨 올랐다.
모퉁이를 돌 때면 버스 안 사람들, 모두가 한 방향으로 쏠려 위태위태한 비명을 느리게 질렸다.
발이 포개어진 것도 모자라 공중부양되어 숨도 크게 못 쉬고 1시간여를 툴툴거리며 달렸다.
내리는 것도 타는 것만큼이나 곤욕을 치렀다.
콩나물시루 버스, 빽빽하게 밀착되어 있는 사람들 틈바구니 사이를 헤집어 바늘구멍을 뚫었다.
한 번에 못 나가고 팔을 빼내고 머리를 빼내고 관절을 꺾어 하나씩 하나씩 옮겨 겨우 완전체의 몸을 빼냈다.
낙타가 바늘귀 통과하듯 했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맡겨둔 책가방 제 알아서 주인 품에 척 안겼다.
길을 터 주느라 출입문쪽에 섰던 사람들 상당수가 내렸는데, 다시 타는데도 애를 먹었다.
우리 동네에서 절반도 더 내린 것 같은데 고무줄 버스라서 그런가,
내리기는 했나 되레 의문이 들 정도로 아무런 표시가 나지 않았다.
처음 그대로 빵빵하게 부푼 상태였다.
여전히 버스는 만원 인체로 통통 퉁퉁 튀어 오르며 종점을 향했다.
아버지 뵈러 고향 가는 길,
버스에 탄 사람 언니와 나 둘 뿐이다.
그 많던 사람들 다 어디 가고 고무줄 버스 혼자 독차지하고 앉았으니,
이래도 되나 싶어 괜스레 무안하여 얼굴이 붉어진다.
버스, 빈차만 다니다 오랜만에 사람 구경하여 반갑다 한다.
여기 고향사람이냐며 강남 간 제비 소식을 물어다 준다.
아침 7시 10분 첫차를 타고
저녁 6시 50분 막차를 타고 통학하던 중학교 시절,
고향의 버스는 장날만 되면 미어터졌다.
농산물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철에 오죽했으면 짐보따리에도 요금이 매겨졌을까.
짐값을 가지고 주네 마네 옥신각신하며 차장 언니와 어르신들 사이에 힐난한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가을에 우리 집 밤자루, 짐칸자리 겨우 빌붙어 가면서도 어른 몫이상의 버스요금을 지불하였다.
태워만 준다면야 감지덕지지, 어디에 얹혀간들 불평하리오, 하지만
1층 위에 2층, 2층 위에 3층, 3층 위에 4층, 4층 위에 5층 켜켜이 얹혀 가다 보면
아이 갑갑해! 아이 숨 막혀! 아이 캄캄해!
'제발 나 좀 꺼내줘요, 제발 나 좀 살려줘요' 신음이 절로 터졌다.
농촌마을 집집마다 하나씩 걸려있는 큼직한 달력,
새해가 되면 부모님은 집안 대소사와 농사일을 표시하셨고, 나는 조바심을 내며 장날을 샅샅이 살폈다.
달력을 한 장씩 넘기며 1년 12달 2일과 5일 장날의 운명을 점쳐보는 일은,
어느 분이 담임선생님이 되실지, 몇 반이 될지보다 더 중대한 사안이었다.
토요일에 장날이 체일 때면 절규하며 미술교과서로 흐느적흐느적 걸어 들어갔었다.
장날만 되면
버스도
사람도
짐보따리도 모두 절규하였다.
태워달라 태워달라 애원하는 절규의 소리가 빗발쳤다.
가까스로 첫차를 타고 학교에 도착하면,
다리는 후들후들, 손은 바들바들, 머리는 지끈지끈, 눈은 흐릿흐릿, 귀는 머엉 머엉.
장날만 되면
이내 몸은 아비규환 되었다.
미술시간,
교과서를 펼쳤더니 뭉크의 절규가 나를 보며 윙크하였다.
뜨악!, 내가 왜 저기에 있는 거야?
책 속에 내가 있었다.
고막을 찢고 마음에 구멍을 뚫어버리는 시커먼 절규의 외침에 난 그만 울어버렸다.
나의 자화상, 뭉크의 절규!
중 1 미술교과서에서 처음 보고 받은 충격, 아악! 외마디 비명이 나를 관통했었지.
미술 선생님은 나를 보며 모나리자의 미소를 닮았다 하셨지만 나는 알지.
절규 앞에서 눈물을 뚝뚝 떨구는 내가 누구와 가까운지를.
지금도 여전히 도플갱어 절규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