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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미경 Dec 20. 2023

밥 짓는 아버지

아버지 음식에 엄마가 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는 반년 넘게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었다.

마음이 갈기갈기 찢겨 만신창이가 되니 도무지 목구멍으로 뭐가 넘어가야 말이지. 

아무리 씹어도 혀에서만 제자리걸음으로 뱅뱅 맴돌 뿐 삼켜지지가 않았다.

어쩌다 아이들과 밥상에 앉아서 한두 술 억지로 밀어 넣어 보았지만 그마저도 입이 거부하여,

나는 홀로 오렌지 한두 알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헛헛한 마음 달래려고 한동안 셋째 언니와 함께 아버지를 찾았다.

일 년에 한두 번 가던 고향길을 2주가 멀다 하고 다녔다.

버스에서 지하철로 갈아타고, 기차를 타고, 버스 타고 다시 또 버스를 타고 가는 길을 

창가에 기댄 채 멍하니 있다, 내릴 때가 되면 벌떡 일어나 뭔가에 씐 듯이 초점 없이 걸어가곤 했다.


아침 8시가 조금 넘어 집에서 출발하면 오후 1시가 안 되어 도착한다.

우리 아버지 점심을 차려 놓고 바깥에서 큰길을 내다보며 버스 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신다.

집에서는 한술 뜨는 것도 어렵더니 이상하게 아버지가 차려준 밥상은 술술 넘어갔다. 

머위찜 한술에 봄이 왔다. 따뜻하니 따뜻했다.

아버지가 지은 밥은 단맛이 났다. 



한 때 건강이 바닥을 쳤었다.

미련하게 몸의 이상증세를 자연적인 노화로 착각해 병원 갈 생각도 않다 5여 년간 생고생만 진탕 했었다.

한 끼 식사 후 나오는 설거지도 한 번에 끝내지 못하고, 

부엌바닥에 한참을 주저앉아 있다 서너 번에 걸쳐 겨우 마치곤 하였다.

숨이 차서 말하는 중간중간 뚝뚝 끊기며 부저음이 났다. 여기저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설날에 시댁에서는 혼자서도 바둥거리며 어찌어찌하였는데

친정에서까지 몸 쓰기가 엄두가 나지 않아, 

인사만 드리고 바로 일어설 것이라며 남편에게 선포를 하고 출발하였다.

두 양반이 한 방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TV를 보고 있는 것이 애처로웠지만, 

내가 우선 살고 봐야겠기에 무릎이 방바닥에 닿자마자 일어섰더니,

아버지가 "벌써 간다고, 뭐라도 먹고 가야재" 하시며 

밖에 밥 차려놨으니 한술이라도 뜨고 가라며 나선 발걸음을 한사코 붙드셨다.


우리 아들이 먹어 보고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곰탕이라며 외갓집에 갈 때면 맛볼 수 있을까 기대케 하는, 

먹어도 먹어도 자꾸자꾸 먹고 싶다는 '소머리 곰탕'을 먹고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의 정을 느꼈다.

늘 어렵고 무섭고 차갑기만 해서 대문 밖에 서성였던 시간들이 

오랜 방황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단잠에 든 것 같았다.  

나에게 소머리 곰탕은 아버지에 대한 첫사랑이다. 



뇌경색으로 쓰러진 엄마가 일상생활에는 지장이 없을 정도로 회복하셨지만, 아버지가 살림을 도맡아 하셨다. 

주부인 나도 삼시 세끼 차리기가 힘에 부칠 때가 많은데, 먹고 돌아서면 뭘 해 먹을지 걱정이 앞서는데, 

아버지는 요리에 일가견을 보이셨다.

며느리들 입맛에도 합격점을 받은 우리 아버지 음식 솜씨는 일취월장하였다. 

  

"박은 닭 넣고 탕 해 먹는 게 국물이 시원하니 속도 편하고 제일 낫다"시며

얼갈이배추를 넣고 민물고기로 끓인 톡톡한 추어탕,

물러지면 안 된다고 더운물 샤워를 시킨 후 부추로 속을 채워 아삭하게 담근 오이소박이,

산초를 넣어 알싸한 열무김치, 꿀을 넣어 달싹한 더덕김치, 

돼지고기를 넣고 부친 두릅전, 야들야들 노릇노릇하게 구운 부추전 파전 호박전,

동짓날에 팥죽 쑤고, 늙은 호박으로 호박죽 끓이고, 

옻나무 가지 잘라 옻닭 하고 엄나무 가지 잘라 수육 하고,

밥통에 가지를 쪄서 무친 생글생글한 가지나물이며, 파릇하게 데쳐 무친 시금치 나물이며

내놓는 음식마다 얼마나 정갈하고 맛나던지 내 눈엔 '고든 램지' 뺨쳤다.


"너거 엄마한테 물어보고 다른 건 다 대충 하겠던데, 

재래기는 아무리 해봐도 너거 엄마 하던 맛이 안나더라"며

산에 들에 철마다 나오는 먹거리로 산해진미를 만드느라 여념이 없으시다. 

하기야 어렸을 때 우리 형제자매들이 다른 집에 놀러 가서 몇몇 집 빼고는 젓가락을 함부로 놀리지 않았으니,

아버지 음식에 엄마가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 엄마는 손맛이 참 좋았다.

큰집에는 장도 달다던 숙모,  

막걸리 식초를 넣고 갓 버무린 열무재래기에 밥을 한 양푼 비벼 춘향전의 이도령처럼 드시던 고모부,

파젯날 아침 식사하러 오신 동네 사람들 모두 이구동성으로 엄마의 음식을 제일로 쳤다.

잔칫날 엿을 꼬아 품앗이를 해주고, 약과, 유과, 정과를 만들어 설날을 놀라게 했다. 

고사리찜, 머위찜, 갖가지 묵나물볶음, 자투리 배 사과를 무와 함께 뚝딱 만든 즉석 물김치, 

박바가지에 차돌로 생들깨를 갈아 넣고 끓여 주던 쑥국, 고동국에

명태를 손질하고 나온 내장으로 무를 얄팍하게 썰어 넣고 고춧가루로 버무린 젓갈이며

소풍 가는 날이면 포실포실한 팥소를 품은 찐빵은 덤이고

치자물을 들여 반죽하여 자박한 기름에 튀긴 듯 구운 듯한 노랑 송편,

떡메를 오지게 쳐서 빚어 맛도 맛있지만 색이 곱기로 유명했던 해쑥떡에, 감잎 받침 모시송편에

우리 6남매에게 음식에 대한 추억을 가득 심어 주고 가신 엄마다.



지난 11월 26일 날에 "너거 언제 시간 있거든 와서 김치 가져가라"며 아버지가 전화를 하셨다.

우리 아버지 올해도 논에 심은 배추로 혼자서 김장을 하시고는 

자식들 준다고 보따리 보따리 싸두고는 어느 놈이 먼저 오려나 오매불망하고 계신다.


아버지,

지 소원은예 동짓날 긴긴밤을 허리춤에 베어서 아버지와의 시간에 이어 붙이는 거라예.

방학하면 애들 데리고 한 번 갈게예.

마루랑 잘 지내시고 계셔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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