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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미경 Feb 26. 2024

촉촉한 수박입니다

세탁기 수거합니다

무엇이 무엇이 똑같을까

젓가락 두 짝이 똑같아요

무엇이 무엇이 똑같을까

윷가락 네 짝이 똑같아요

무엇이 무엇이 똑같을까

첫째와 둘째가 똑같아요



서너 살쯤, 둘째는 베란다 방충망에 머리를 박고 바깥세상 구경하는 것을 즐겼다.

뭐가 저리도 재밌을까 나도 함께 시선을 따라가 보았다.

위에서 내려다 보이는 아찔함이 좋은 걸까?

올려다봐야만 하는 수고로움을 덜어서 좋은 걸까?

이마에 세로가로 모눈종이를 까맣게 갖다 붙이고도 해맑게 웃었다.


방충망에 보름달만 한 크기의 둥그런 자국이 파였다. 

가장자리는 터지고 느슨해져 그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모기에 뜯겨 도통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여러 날 밤, 잠을 설치며 울긋불긋 가려운 꽃구경에 지치고 지쳐 방충망을 새로 교체하였다.

"아들아, 구경도 좋지만 우리 집 형편도 생각해 줘야지, 

 앞으로는 방충망에 머리가 닿지 않도록 조심하자꾸나" 

나의 당부에 아들은 "응, 응, 알겠어요"고개를 까딱거리며 명랑하게 대답하였다.


 

아이패드 카메라를 켜서 연속으로 셧트를 눌려 바깥 풍경을 담아 

이리 늘리고 저리 늘리며 시공간을 부드러운 곡선으로 바꾸어 나에게 자랑하듯 보여 주었다.

말도 않고 카메라를 들이밀어 후줄거리한 내 모습을 찍고서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를 표방한 편집을 하여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얼굴이!!!!" 하며 깔깔거렸다.


"하~~~, 이게 뭐야?, 엄마 기분이 아주 나쁜걸!

 엄마 허락도 없이 이렇게 하는 건 초상권 침해야,

 빨리 지워줘"

마귀할멈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눈, 코, 입이 사방팔방 미쳐 날뛰는 모양새가 아무리 착한 눈으로 보아도

어디 하나 멀쩡한 구석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엄중하고도 단호하게 삭제요청을 하였다.


  "다음부턴 안 할게요, 엄마?, 엄마, 미안해요.

   봐요, 봐요, 이제 없죠"

아들은 애교 넘치는 사과와 함께 바로 깨끗하게 지우고는 확인 도장을 받았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만발하게 드러내며 뭐가 그리 좋은지 항상 키득키득 싱글벙글하였다.



해가 길어진 초여름 첫째의 하교시간이 다가올 때쯤, 집 앞 도로에 트럭 한 대가 느릿느릿 지나갔다. 

"세탁기 세탁기 수거합니다"

"고장 난 테레비 테레비 수거합니다"

각종 가전제품을 수거한다는 안내방송을 하면서 거북이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밖을 내다보는 재미에 푹 빠져 있던 우리 아들, 새로이 등장한 이 신선한 소리를 놓칠 리가 없다.

베란다로 쪼르르 달려가더니, 이내 성대모사를 하였다.

"촉촉한 수박입니다"

"엄마, 봐봐요"

"촉촉한 수박입니다"


급기야, 아들은 부엌에서 저녁 준비를 서두르는 나를 불러 세워 앉혔다.

발은 모으고 손끝은 아래로 향하게 하여 똑바른 자세로 서서는 또롱 또롱한 목소리의 볼륨을 올렸다.

"촉촉한 수박입니다"

"촉촉한 수박입니다"

"촉촉한 수박입니다"

입을 방긋방긋 벌리며 트럭의 방송 멘트를 흉내 내었다.


세탁기가 수박으로 환골탈태하는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졌다.

"우와! 완전 똑같네!?!" 

"어쩜 이리도 잘하나!" 박수를 쳐 주었다. 

그리고 "수박이 먹고 싶니?" 물어보았다. 

엄마의 물개 박수에 아들은 수줍은 미소를 띠며 "네, 네, 먹고 싶어요" 대답도 시원하게 하였다. 


둘째의 손을 잡고 뒷베란다로 나가, 그때까지 시동을 켠 체 멈춰 서 있는 트럭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수박은 없는데 촉촉한 수박이라고 외치는 이상한 트럭이다.

"어디 보자, 수박이 보이니? 잘 찾아보자, 수박아~, 어디 있니?"

   "수박? 음~ 음~ 수박 안 보여요, 수박 없어요"

"그러네, 수박이 없네, 벌써 다 팔렸나?"

수박은 온데간데없고 티브이 한두 대가 휑하니 보였다. 


"이번엔 자세히 들어보자, 트럭이 뭐라고 하는지, 쉿~"

   "쉿~~~"

아들은 검지를 세워 입에 대고 조용히 앉아 때를 기다렸다.

주변의 모든 소리들이 바닥에 납작 엎드리니, 둘째의 숨소리가 크게 느껴졌다.

긴장감이 팽팽했다.


"세탁기, 세탁기 수거합니다"

"고장 난 테레비 테레비 수거합니다"

때마침 트럭이 안내 방송을 쏘아 올렸다.


"들었니?

 엄마 귀에는 '세탁기 수거합니다'로 들리는데........ 

 둘째는 어떻게 들려?"


 "음~,음~, 엉? 수박이 아니네!"

귀를 최대한 높이 세우고 오직 한 곳에만 집중하여 가만히 들어보던 우리 아들,

그제야 '촉촉한 수박'이 아니라

'세탁기 수거'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배꼽이 빠지도록 웃었다.

"우후후 후!, 수박!, 우하하 하!, 세탁기!, 어~,허~,허~,허!"

 


6개월이 지나도록 입덧이 가시지 않았다. 

유일하게 찾는 것이 수박이었다. 

한 겨울에 수박을 끊이지 않고 들여 "둘째야 이거라도 먹고 힘내자"하며 삼시 세끼를 먹었다.

그래서 그런지 아들은 젖니가 다 나오기도 전에 수박을 옹골차게 잘도 먹었다.

하얀 티셔츠에 수박물을 빨갛게 들이며 

볼 탱탱 볼록볼록 얼마나 복스럽게 먹든지........

보고 있노라면 반하지 않을 수 없는, 애정이 뿜뿜 무한이 솟구치는 아이였다.


아무래도 둘째가 수박이 먹고 싶어 그렇게 들은 것 같아 

"우리 아들, 수박 많이 먹고 싶은가 보네.

 다음번에 마트 가면 수박 한 통 꼭 사자꾸나, 약속" 손가락을 걸고서 복사까지 하였다.


'촉촉한 수박입니다'

'세탁기 수거합니다'

똑같다!? 아닌가?! 똑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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