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rliner Philharmonie
베를린의 모든 건축물들이 거의 다 파괴되어 종전 후 실의에 빠져있던 독일인들에게 미국의 마셜은 한줄기의 빛이 되어 독일 재건에 큰 힘이 된다. 마셜이 작성한 플랜에 의해 공산주의의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서독을 경계로 유럽에 막대한 자금이 지원된다. 종전 후 독일 재건에 힘을 쏟아 1차적인 재건을 마친 1956년 전용 홀 없이 이곳저곳에서 연주를 하던 베를린 필을 위해 전용홀 건립위원회가 결성되고 설계를 공모한다. 베를린 시민들이 주축이 되어 베를린의 상징이자 독일의 최고 오케스트라인 베를린 필을 위해 전용홀을 건축하는데 자금을 모으고 설계를 공모하여 1957년 한스 샤룬이 설계한 설계도가 선정된다. 그러나 이 설계는 착공단계에서부터 많은 논란이 시작된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이라고 볼 수 있는 무대를 중앙에 배치하고 관객석을 둘러 쌓여놓은 형태와 전통적인 직사각형의 건축물이 아닌 비대칭적 건축물로 건축비가 배 이상이 들어가고 연주홀의 최대 숙제인 어쿠스틱의 확실한 결과가 인정되지 못해 많은 비평과 논란 속에 착공 전 혼란에 빠지자 지휘자 카라얀은 이 설계대로 건축이 되지 않을 경우 베를린 필을 사임하겠다는 배수진을 치고 이에 베를린 필 단원들도 동조를 해 논란을 잠재우고 1961년 12월 1일 건축에 들어가 37개월 만인 1963년 10월 15일에 완공된다. 건축경비는 평범한 연주회장 건축비에 거의 3배에 해당하는 당시화폐로 천칠백만 마르크가 소요되고, 2,250석의 좌석을 가진 메인 홀과 이후 1,180석의 실내악 전용홀로 건축된다.
개막 축하 공연은 베이토벤 심포니 9번을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의 연주로 베를린 음악제 중에서였다. 지휘자 카라얀이 힘을 쏟아 많은 비평을 잠재워 건설된 이 홀은 완공되자 비평가들 사이에 "Zirkus Karajani"라고 놀림을 당하기도 하지만 이후 1973년 건축된 "Sydney Opera House" 1978년 "Denver's Boettcher Concert Hall" 1981년 "Gewandhaus " 2003년 "Walt Disney Concert Hall" 2015년 "Philharmonie de Paris" 등이 이 연주홀을 롤 모델 삼아 건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