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카시아 Aug 15. 2021

절대 용서할 수 없는 것

할아버지 발인 하루 전날.

엄마가 고모 앞에서 몸을 들썩이며 울고 있었다. 그날 밤의 일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날의 기억은 자주 떠오르고, 떠오를 때마다 내 정신은 피폐해진다.


아빠는 4남매 중 셋째이자 둘째 아들이다.

8  4명의 자식을 잃은 할머니는 자식에 대한 애착이 매우 강하셨고,  애착은 우리 가족에게 향했다.

유일하게 고향에서 가정을 꾸린 아빠는 할머니의 집착 같은 애착과 사랑을 동시에 받았다.

그래서였을까, 우리 가족의 매 주말은 할머니 집 방문이 1순위였다.


할머니의 암 판정 이후 부모님은 빚을 내어 할머니의 소원인 ‘마당이 있는 넓은 집’을 사서 할머니, 할아버지를 모셨다.

할머니는 넓은 집에서 사계절도 맞지 못하고 일찍 돌아가셨지만, 할아버지는 15년 정도 우리와 함께 지내셨다.


가정사가 복잡했던 큰아빠는 할아버지를 돌볼 여력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집안 대소사는 아빠가 챙기게 되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늘 엄마가 계셨다.

엄마는 아빠가 하는 모든 일에 힘을 보태주셨고, 위태로운 아빠의 가족들을 함께 돌보았다.


내가 보기에 큰엄마와 큰아빠는 혼자되신 아버지를 모시는 동생에 대한 고마움보다, 본인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해내는 우리 부모님에 대한 질투심이 커 보였다.

거기다가 할아버지까지 모시고 명절을 치르게 되었으니 우리 집은 ‘큰집’ 아닌 ‘큰집’이 되었다.

부모님은 큰아빠네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하는 것에 미안함을 가지고 계셨다.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큰아빠네를 탐탁지 않아했던 고모는 우리 부모님의 공로를 치켜세우며 치하했다.

할아버지 생신 때는 큰엄마 보란 듯이 엄마에게 고생했다며 금 목걸이를 걸어주셨고,

한 번씩 우리 집에 오시면 ‘친정’에 왔다간 것 같이 마음이 편하다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며 인증샷을 단체 메신저 방에 잔뜩 올리곤 하셨다.

그래서 그때는 고모의 칭찬이 듣기 좋았다.

부모님의 마음씀과 노고를 알아주는 것 같아서.


몇 년이나 지난 일이다.

정신없던 장례식장, 대충 치워진 테이블에 마주한 엄마와 고모.

엄마의 눈에서 끝없이 흐르던 눈물과 애처로운 목소리, 예의라고는 찾을 수 없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고모.

아직도 그날이 선명하다. 잊히지 않는다. 어떻게 잊을까.


조문객들이 한바탕 지나가고, 고모가 뒷정리를 하고 있는 엄마를 불러 앉혀 말했다.

큰아빠네가 할아버지 제사를 맡는 것이 싫으니 우리 부모님이 맡으라고.

큰아빠는 항상 장남으로서 할 일을 하지 못한다는 부채감을 갖고 사셨기 때문에, 할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 했던 가족회의에서 제사를 책임지겠다고 말씀하셨다.

당연한 말이지만 한번 더 정확하게 언급했던 사안을 고모가 독단적으로 깨려고 했다.

엄마는 이미 가족회의에서 결정된 사안이고, 엄마가 여기서 결정할 일이 아니라고 말하셨다.


(엄마는 고모를 '고모'라고 부르신다.)


“너 제사 지내기 싫냐?”

“네, 고모. 제사까지 맡고 싶지 않아요. 그동안 애들 아빠랑 제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세요…?

애들 아빠는 아주버님 대신 저희가 아버님 모시는 것도 미안해했고, 애들 아빠 편하게 잔 날이 얼마 없어요.

고모랑 아주버님 사이 틀어질까 봐 이쪽저쪽에서 고생한 거 아시죠. 저한테도 말 잘 안 하고 혼자 끙끙 앓아요.

수십 번 물어보면 겨우 말해주고 그랬어요. 이제 애들 아빠도 좀 편하게 살면 좋겠어요.

제사 준비하는 게 싫어서냐구요? 10년 넘게 대가족 명절을 지냈는데 그게 뭐 어렵겠어요. 애들 아빠가 하자고 하면 저는 해요.”


“너 우리 아부지 모시는 거 싫었구나?”

“아니요 고모,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시부모님 모시는 거 쉽진 않았어요. 그래도 저는 애들 아빠가 그렇게 하길 원하니까 따랐던 거고, 저희 나름대로 최선을 다 했어요.”

“니가 아부지 모시는 거 내 마음에 들었을 것 같냐? 나도 다 참고 산거야. 너 마음에 안 들었어.”

“어떻게 만족하시겠어요. 그래도 고모, 그렇게 말씀하시면 전 속상해요.”


고모가 엄마를 ‘너’라고 지칭하는 것부터 짜증이 났다. ‘너’라니.

엄마는 계속 울면서 말씀하셨고, 고모는 삐딱하게 앉아서 엄마를 향해 계속 쏘아붙였다.

할아버지를 모시며 부모님이 했던 것이 다른 사람들 눈에 어떻게 비칠지는 모르겠다.

부모님은 늘 최선을 다하셨기에, 할아버지를 모시지 않은 그 누구도 뭐라고 지적할 수는 없다.

심지어 고모는 일 년에 한두 번 올까 말까 했다. 그런 고모가 나의 엄마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은 없다. 전혀.


누군가에게는 ‘부모를 모신다는 것’이 방 한 칸 마련해주고, 같이 식사를 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부모를 봉양하는 것은 다르다. 시간과 돈, 마음을 쏟는 정성이 필요한 일이다.


“니 우리 아부지 죽기를 기다렸구나?”


“고모, 어떻게 그렇게 말하세요…? 하나님한테 맹세코 한 번도 그런 생각 한 적도 없고, 지금 고모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정말 너무 속상해요.

고모 말씀대로 제사를 저희가 지내면 그게 끝일 것 같으세요? 아니에요.

제사를 저희가 가져오는 건 아주버님의 ‘장남의 권한’도 가져오는 거예요.

애들 아빠 힘들어하는 건 이제 보기 싫어요. 이제 애들 아빠도 저도 그런 부담에서 내려오고 싶어요.”

엄마는 밑도 끝도 없는 고모의 막말에 울면서 대답했다.


엄마와 고모의 대화를 듣는데 머리가 핑 돌았다. 듣고만 있을 수 없어서 고모에게 말했다.

“고모, 엄마 말대로 제사 얘기는 두 분이서만 할 얘기가 아니고, 나중에 큰아빠랑 저희 아빠, 작은 아빠까지 다 모아놓고 얘기하세요.

왜 저희 엄마한테 그러세요? 그리고 고모는 부모님이나 시부모님 모시고 산 적 없잖아요. 그렇게 함부로 말씀하시면 안 돼요.”

눈물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여기서 울면 고모에게 말릴 수 있다는 생각, 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눈물을 삼키며 말했다.

엄마가 나를 달래며 괜찮다고, 그만하라고 했을 때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때, 한참 부조금 정산을 하고 있던 아빠가 엄마를 찾으러 왔다가 울고있는 엄마와 나를 보셨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아빠의 눈짓에 “이따가 말씀드릴게요.”하고 일어섰다.


그리고 그날 새벽, 아빠에게 자초지종을 설명드렸다.

나는 엄마가 왜 그런 몹쓸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고, 고모는 무슨 자격으로 엄마한테 저러는지 모르겠다고 말 했다.

아빠는 듣는 내내 한숨을 쉬셨고, 한동안 말이 없으셨다.

“그래도 니가 엄마 옆에 있어줘서 다행이다. 미안하다…” 아빠의 말에 또 한 번 눈물이 터졌다.

아빠가 미안해할 것은 없는데, 아빠의 마음고생을 알기에 더 마음이 아팠다.


발인 당일,

입에 쓰레기를 물었던 전날 밤의 고모는 아무렇지도 않게 나와 엄마를 대했다. 사과는 없었다.

화가 나서 고모에게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어젯밤 아빠의 미안하다는 말이 마음에 남아 차마 그러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도 고모는 사과하지 않았고, 가족들 중 누군가에게 ‘내가 그날 밤 귀신이 들렸나 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걱정과 후회가 많은 나와 달리,

지나간 일에 마음 쓰지 말고 잊는 것이 좋다고 말씀하시던 엄마는 늘 긍정적인 사람이다.

어려운 문제도 쉽게 바라보고 풀 수 있는 강한 사람이고, 가족뿐만 아니라 주변의 어려운 이웃에게도 마음을 쓰는 선한 사람이다.

그런 엄마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7개월 만에 뇌경색으로 쓰러지셨다.

아니, 고모한테 몹쓸 말을 들은 지 7개월 만에 쓰러지셨다.


그리고 고모는 시술받으러 들어간 엄마를 두고 그런 말을 하셨다.

“니네 아빠 평생 할머니 할아버지 병 수발했는데, 이제 니네 엄마 병 수발하고 살 뻔했다~!”

농담이어도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고,

아빠를 걱정하며 말하는 진심이더라도 엄마가 걱정되어 한밤중에 달려온 자식들 앞에서 할 소리는 아니다.


고모와 관련된 것이 하나라도 내 일상을 스치면 그때의 순간이 재생된다. 심장이 꽉 막힌 듯 답답해지고, 머리가 쿵쿵 울린다.

그날 고모 앞에서 엄마를 더 감싸지 못한 나 자신을 탓하기도, 고모에게 더 화를 내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잊지 못하는 나에게, 점점 더 화가 나는 나에게 문제가 있나 싶어 정신과 상담까지 고민했다.


착한 엄마는 아빠를 생각해서라도 그날 일을 잊어버리라고 하신다.

엄마에게도 아빠에게도 미안하지만, 난 그럴 수 없다.

엄마의 눈물을 처음 본 그날 밤의 기억은 평생 날 따라다닐 것이다.

고모가 엄마에게 진심으로 사죄하기 전까지는 고모를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아니, 사죄하더라도 용서하지 못 한다.


절대.


당신이 옳다, 정혜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