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한 요람
고향에 내려가면 숨이 조금 얕아진다.
공기가 바뀌어서가 아니다.
그 집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현재의 내가 아니라
과거의 나로 접힌다.
마치 오래된 옷을 다시 입은 것처럼.
몸은 커졌는데, 소매는 여전히 짧다.
말을 꺼내기 전 이미 결론이 도착해 있고,
이해를 기대하기보다 해답이 먼저 내려앉는 공간.
그래서 나는 일찍부터 독립하고 싶었다.
자유가 아니라, 안전이 필요했다.
어머니는 감정이 빠른 사람이었고
나는 그 감정을 먼저 읽는 아이였다.
존중보다 기분이 앞서는 말들,
대화라기보다 판정에 가까운 답들.
내 이야기는 자주 수정되었고,
나는 설명을 줄이는 법을 배웠다.
그렇게 나는 단단해졌다.
단단함은 갑옷 같았다.
빛이 나진 않지만, 뚫리지도 않았다.
나는 울지 않았고,
기대하지 않았고,
스스로 해결하는 사람이 되었다.
“다 큰 사람이면 알아서 해야지.”
그 말을 마음속 표어처럼 붙이고
어리광을 연습할 기회를 놓쳤다.
어리광은 사치처럼 느껴졌고,
기대는 위험처럼 느껴졌다.
한 번은 친했던 친구에게
“일하기 싫다, 힘들다” 같은 말을 자주 했다.
그건 불평이 아니라
숨을 고르는 작은 신호였다.
하지만 그 말은 다른 사람에게 전해졌고
나는 그때 알았다.
약한 말은
항상 안전하게 보관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 이후로 나는
조용히 선을 긋는 사람이 되었다.
싸우지 않는다.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판단하고, 물러난다.
사람들은 내가 밝다고 말한다.
맞다. 나는 밝다.
낯선 사람과도 잘 웃고,
장난도 잘 치고,
역할에 맞는 친구들을 두루두루 둔다.
나는 햇빛 아래에서 잘 자라는 식물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뿌리는
늘 물의 온도를 계산한다.
이 사람에게
조금 더 기대도 되는가.
내 이야기를 맡겨도 되는가.
나는 부정적인 사람을 견디지 못한다.
정확히는, 멈춰 있는 공기를 견디지 못한다.
반복되는 불평,
세상을 탓하는 목소리,
성장하지 않는 태도.
아마도 나는
다시 그 무거운 공기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더 단단해졌다.
하지만 단단함은 완성형이 아니다.
생존형이다.
나는 원래 단단한 사람이 아니다.
상황 속에서 굳어버린 사람이다.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한다.
단단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
나에게도 허락될 수 있을까.
해결책 대신 이해를,
조언 대신 고개 끄덕임을,
정답 대신
“그래, 힘들었겠다”라는 한 문장을 건네는 사람.
나는 사람이 부족한 게 아니다.
동반자가 필요하다.
밝은 나를 좋아하면서도
진중한 나를 두려워하지 않고,
내가 잠시 기대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
어릴 적 나는
부모와 성숙한 대화를 나누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존중이 깔린 관계가 어떤 것인지
자연스럽게 배운 사람들.
나는 그 장면을
창문 밖에서 바라보는 아이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부러움은
때로 방향이 된다.
나는
내가 보고 싶었던 어른이 되고 싶다.
누군가가
“나 오늘 좀 힘들어”라고 말했을 때
정답 대신
자리를 내어주는 사람.
어쩌면
내가 찾고 있는 동반자는
이미 내 안에서 자라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