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해진 사람

아담한 요람

by 김준성

고향에 내려가면 숨이 조금 얕아진다.

공기가 바뀌어서가 아니다.

그 집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현재의 내가 아니라

과거의 나로 접힌다.


마치 오래된 옷을 다시 입은 것처럼.

몸은 커졌는데, 소매는 여전히 짧다.


말을 꺼내기 전 이미 결론이 도착해 있고,

이해를 기대하기보다 해답이 먼저 내려앉는 공간.

그래서 나는 일찍부터 독립하고 싶었다.

자유가 아니라, 안전이 필요했다.


어머니는 감정이 빠른 사람이었고

나는 그 감정을 먼저 읽는 아이였다.


존중보다 기분이 앞서는 말들,

대화라기보다 판정에 가까운 답들.

내 이야기는 자주 수정되었고,

나는 설명을 줄이는 법을 배웠다.


그렇게 나는 단단해졌다.


단단함은 갑옷 같았다.

빛이 나진 않지만, 뚫리지도 않았다.

나는 울지 않았고,

기대하지 않았고,

스스로 해결하는 사람이 되었다.


“다 큰 사람이면 알아서 해야지.”


그 말을 마음속 표어처럼 붙이고

어리광을 연습할 기회를 놓쳤다.


어리광은 사치처럼 느껴졌고,

기대는 위험처럼 느껴졌다.


한 번은 친했던 친구에게

“일하기 싫다, 힘들다” 같은 말을 자주 했다.

그건 불평이 아니라

숨을 고르는 작은 신호였다.


하지만 그 말은 다른 사람에게 전해졌고

나는 그때 알았다.


약한 말은

항상 안전하게 보관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 이후로 나는

조용히 선을 긋는 사람이 되었다.


싸우지 않는다.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판단하고, 물러난다.


사람들은 내가 밝다고 말한다.

맞다. 나는 밝다.


낯선 사람과도 잘 웃고,

장난도 잘 치고,

역할에 맞는 친구들을 두루두루 둔다.


나는 햇빛 아래에서 잘 자라는 식물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뿌리는

늘 물의 온도를 계산한다.


이 사람에게

조금 더 기대도 되는가.

내 이야기를 맡겨도 되는가.


나는 부정적인 사람을 견디지 못한다.

정확히는, 멈춰 있는 공기를 견디지 못한다.


반복되는 불평,

세상을 탓하는 목소리,

성장하지 않는 태도.


아마도 나는

다시 그 무거운 공기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더 단단해졌다.


하지만 단단함은 완성형이 아니다.

생존형이다.


나는 원래 단단한 사람이 아니다.

상황 속에서 굳어버린 사람이다.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한다.


단단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

나에게도 허락될 수 있을까.


해결책 대신 이해를,

조언 대신 고개 끄덕임을,

정답 대신

“그래, 힘들었겠다”라는 한 문장을 건네는 사람.


나는 사람이 부족한 게 아니다.

동반자가 필요하다.


밝은 나를 좋아하면서도

진중한 나를 두려워하지 않고,

내가 잠시 기대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


어릴 적 나는

부모와 성숙한 대화를 나누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존중이 깔린 관계가 어떤 것인지

자연스럽게 배운 사람들.


나는 그 장면을

창문 밖에서 바라보는 아이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부러움은

때로 방향이 된다.


나는

내가 보고 싶었던 어른이 되고 싶다.


누군가가

“나 오늘 좀 힘들어”라고 말했을 때

정답 대신

자리를 내어주는 사람.


어쩌면

내가 찾고 있는 동반자는

이미 내 안에서 자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작가의 이전글다시 만났지만, 다시 가까워질 수는 없었다.